친일파 후손 무차별 송사에 농심이 기막혀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07.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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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소한 사건에 원고 바꿔 또 소송 제기 양평 옥현리 주민 33명 “해도 너무한다”
▲ 친일파 임종상의 친척이 주민들을 상대로 집과 논밭 등의 소유권 이전 소송을 제기한 가루매 마을(위). ⓒ시사저널 임영무

경기도 양평군 옥현리 가루매 마을은 요즘 초상집 분위기다. 60·70대 노인들이 대부분인 이 마을 전체가 친일파 재산찾기 소송에 휘말렸다. 주민들은 지난 6월18일 무려 1천여쪽에 달하는 소송 관련 서류를 우편으로 받았다.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과 논밭 등 약 1만9천4백66㎡(5천8백여 평)의 토지를 모두 내놓으라는 내용이다. 소송 서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친일파 임종상(1962년사망)의 친척인 김 아무개씨(67·여)다. 김씨는 임씨의 조카며느리로 알려져 있다. 임종상은 일제 때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어 일본 황실에 거액의 헌금을 하는 등의 친일 행각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록된 인물이다. 김씨는 사망한 임종상의 아들과 며느리 등으로부터 토지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임종상은 광복 이후 실시된 토지 개혁으로 인해 자신의 재산이 몰수당할 처지가 되자 묘안을 찾았다. 그냥 앉아서 재산을 빼앗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지고 있던 토지를 단국대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 터졌다. 단국대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처 소유권 이전등기를 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임씨는 기부 약속을 백지화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5월에 임씨는 단국대에 기증하기로 했던 재산을 다시 서울 강문중학교에 기부하겠다며 ‘이중 기부’ 의사를 밝혔다.

단국대는 곧바로 ‘소유권 이전등기 절차 이행 청구소송’을 냈고, 지난 1956년 11월 양측은 화해 계약을 체결했다. 임씨가 단국대측에 재산을 기부한 사실을 인정하고 추후 어떤 주장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1957년 11월14일에는 대법원에서 단국대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단국대와 임씨의 분쟁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 청천벽력 같은 소송을 당한 가루매 마을 주민들이 소송 서류(왼쪽)를 들고 불안해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1953년 단국대에 기증했던 재산에 대해 “기부 무효” 주장

그러나 임종상의 후손들은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지난 2005년에는 임종상의 손자 임 아무개씨가 옥현리 주민 4명을 상대로 소유권 이전 소송을 벌였다가 패소했다. 그런데 이번에 경기도와 단국대 등으로 소송 대상자를 확대한 뒤 다시 원고를 바꿔 김씨가 동일한 소송을 낸 것이다. 김씨는 옥현리 주민 33명과 학교법인 단국대학교를 상대로 ‘원인 무효로 인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등’의 소송을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냈다. 즉, 임씨가 단국대측에 재산을 기부한 행위 자체가 원인 무효이며 소유권을 자신의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건은 현재 서울중앙법원 민사합의16부에 배당(2008 가합 16634)되어 계류 중에 있다. 김씨가 소송을 건 주민 중 2명은 2005년 소송에 포함되었던 사람들이다. 옥현리 주민들은 대대로 임종상의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었다. 해마다 꼬박꼬박 소작료도 냈다. 임씨가 단국대에 토지 기부 의사를 밝힐 때까지도 소작료를 냈다고 한다.

토지의 소유권이 단국대로 넘어간 후에는 땅을 분할받기로 하고 매입에 나섰다. 1996년에야 주민들은 비로소 땅을 매입해서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 현재 등기부등본상의 소유권자는 주민 개개인이다. 단국대와 주민들이 체결한 매매계약서도 존재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토지 매입 비용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농협에서 대출을 받거나 빚을 내서 간신히 마련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 임종상으로부터 땅을 매입하고도 증명 서류가 없어 두 번 세 번 매입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적법하게 땅값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가진 주민들은 이해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법에 무지한 주민들은 땅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다. 주민 대표를 맡고 있는 옥현리 새마을지도자 이종진씨는 “김씨가 부동산에 모두 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해놓았다. 변호사 비용만 해도 3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서 끝난 사안을 가지고 다시 소송을 거는 이유를 모르겠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옥현리 주민들도 변호사를 선임했다. 33명 중 16명이 1천6백만원을 냈다고 한다. 이 중에는 돈이 없어서 대응을 하지 못한 주민들도 있다. 부녀회장 박명자씨는 “소송에 대응하지 않으면 우리한테 불리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대응을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80%가 독거 노인들이다. 대부분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소송을 거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다”라며 울먹였다.

한창 농번기에 소송을 당한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원고인 김씨의 주소지 관할에서 재판을 하기 때문에 서울 서초동 법원까지 빈번하게 오고가야 한다. 교통비나 식대 등의 비용도 만만치 않은 데다 농사일을 할 시간까지 빼앗기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더욱 힘들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주민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옥현리 정병기씨는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의 땅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소송을 남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친일 행위다. 법원에서 합리적으로 판결하겠지만 혹시 모를 판결에 대비해 국민이 힘없는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조상 땅 찾아주기 사업’이 친일파 후손 돕고 있는 꼴

주민들과 함께 소송을 당한 단국대도 법적 대응에 들어갔다. 대외협력실 김남필 홍보팀장은 “고문변호사를 통해 소송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전에도 임씨가 비슷한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이번에도 달라질 것은 없다. 사실 재판거리도 안 된다”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찾기 이면에는 정부가 지난 2004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조상 땅 찾아주기 사업’이 있다.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이 사업을 통해 100만평이 넘는 토지가 친일파 후손들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업은 재산 관리 소홀, 조상의 불의의 사고 등으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조상 소유의 땅을 지적 정보를 이용해 찾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 후손을 가려낼 현실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는 광복 후에도 계속되어왔다. 을사 5적으로 불리는 이완용, 송병준 등의 후손들은 조상 땅 찾기를 지속적으로 벌여 50%에 가까운 승소율을 보였다. 친일파 후손들은 지금도 전국에서 재산 찾기 소송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친일 재산인 줄 모르고 산 땅이면 환수할 수 없다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잇따라 나오면서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친일 재산으로 분류되어 국가 귀속 결정이 내려진 토지를 구입한 소유자가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두 건에 대해 잇따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산조사위는 특별법 취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반발했다. 현재 친일 후손과 친일재산을 사들인 제3자가 제기한 행정소송은 모두 26건이며, 이 가운데 제3자 관련 소송이 10건이다.

ⓒ시사저널 임영무
 소송을 당하고 나서 주민들의 반응은 어떤가?
가난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이었다. 어렵지만 서로 힘을 보태며 살아왔다. 우리 마을처럼 선량하게 산 사람들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모두 내 돈 주고 산 내 땅이다. 법적으로도 내 소유다. 일제 때는 친일파에게 시달리고 광복 후에는 그 후손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사는지 일제 시대에 사는지 분간이 안 된다.

정신적 고통이 클 것 같다.
물론이다. 우리 마을은 노인들이 태반이다. 대부분 여자 혼자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소송’이란 것을 접해 보았겠는가.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데 소송 서류가 전화번호부 책만큼이나 두껍다. 혹시나 땅을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우리 마을 주민들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판결이 날 때까지 2년 정도는 걸리는데 그때까지 피 말리는 나날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는가?
울며 겨자 먹기 식 대응이다. 만약 대응을 안 하면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라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단 변호사를 선임하기는 했다. 지난 2005년도에 주민 4명이 소송당했을 때 변호를 맡았던 법률사무소에 맡겼다. 소송 비용도 어렵게 마련했다. 저쪽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데 3억원을 주었다고 한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소송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다.

친일파 후손들이 왜 소송을 냈다고 보는가?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조상 땅 찾아주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부의 행정 시스템을 이용해서 조상의 땅을 열람한 후 소송 등을 통해 찾으려고 한다. 정부의 좋은 취지를 친일파 후손들이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서 친일파 후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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