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물은 피보다 진하다?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07.2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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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부족 해결 위해 공화ᆞ민주 ‘의기투합’… 수자원 공채 발행에 합의
ⓒEPA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드라마틱한 ‘물 정치’가 펼쳐졌다. 공화·민주 양당이 오로지 주민 이익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당리 당략을 버리고 수자원 확보를 위한 공채 발행에 합의하는 대결단을 끌어냈다. 공화당 소속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지사와 민주당 소속 다이앤 파인스타인 연방 상원의원은 최근 수자원 확보를 위해 93억 달러 규모의 물(수자원)공채 발행 법안을 공동 발의하고 오는 11월 총선에서 주민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이 아이디어는 지난 6월 초 슈왈제네거 주지사가 캘리포니아 주의 물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30년 앞을 내다보고 제안한 수자원 정책에서 나왔다.

슈왈제네거는 당시 1백19억 달러어치 공채 발행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협력을 얻기 위해 파인스타인측과 협의해 93억 달러로 발행 규모를 조정해 공동으로 발의하는 데 합의했다. 물 공채의 전체 발행액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30억 달러는 저수지를 새로 짓거나 지하 물 저장고를 건설하는 등 인프라 구축에 쓰인다. 20억 달러는 각 지역 정부 수질 개선 비용으로, 그리고 19억 달러는 새크라멘토 델타 복구비로 쓰인다.

새크라멘토 델타의 산 후아킨 강은 캘리포니아 주 식수원의 중심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산 호아킨 강에 댐을 만들어 수량을 늘릴 계획이었으나 주법원이 이를 불허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캘리포니아 주법원은 새로운 댐 건설로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새크라멘토 델타의 물고기들이 서식지를 잃게 되자 댐 건설 자체를 막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수량 확보에 차질이 생기면서 마실 물 공급 계획을 추진하지 못할 상태에 놓여 있다. 또, 13억 달러를 들여 캘리포니아 산불로 인해 훼손된 삼림을 복구하고 각 지역 저수지의 수질을 개선하는 데 8억 달러를, 폐수 재처리 및 재활용에 2억5천만 달러를 각각 지출한다.

슈왈제네거 주지사, 민주당 파인스타인 상원의원과 합의 이끌어내

슈왈제네거의 물 공채는 이렇게 수자원 확보를 위한 30년 계획과 맞물려 있다. ‘30년 프로젝트’는 앞으로 30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 인구 증가로 인한 물 수요 증가와 가뭄 등에 따른 수자원 감소 사태에 대비한 장기정책이다.

캘리포니아 주는 지난 2006년 강우량이 적어 가뭄 조짐을 보이다가 2007년 우기인 겨울철에 충분한 비가 오지 않아 이제 식수난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행히 올 초 예상보다 눈이 많이 내려 급한불은 껐지만 다시 가뭄이 예고되면서 주정부가 비상 상태에 들어갔다. 슈왈제네거 주지사가 물 공채 발행 제의에 앞서 ‘캘리포니아 주 가뭄 선언’을 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남캘리포이나의 대표 도시인 로스앤젤레스 시를 비롯한 대다수 도시는 최근 물 소비 줄이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슈왈제네거의 가뭄 선언에 협조하기 위해서다. 비야라이고사 로스앤젤레스 시장은 물 소비를 예년에 비해 20% 줄이자며 시민들을 독려하고 있다.

북캘리포니아는 비와 눈이 많고 삼림이 우거져 수자원이 풍부하다. 반면 사막 지대인 남캘리포니아는 자체 물 확보 수단이 거의 없어 북캘리포니아의 물을 파이프나 운하를 통해 공급받고 있다. 북캘리포니아에서 물 확보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남캘리포니아에서 즉각 물 소비 줄이기 캠페인에 들어가는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물 부족은 이미 30여 년 전부터 예고되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가뭄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물 아끼기 캠페인이 계속되면서 2008년 현재 캘리포니아 주의 가구당 하루 물소비량은 60갤런으로 30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슈왈제네거의 물 공채는 이같은 가뭄에 대비해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지만 주정부 예산이 아닌 공채로 해결하기로 한 것은 고육책이었다. 주정부 예산 적자가 이미 150억 달러를 넘고 있어 주민 세금으로는 더 이상 재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물탱크 역할을 하는 샤스타 호수. ⓒEPA

‘부채 증가’ 비난 뚫고 “초당파적 리더십으로 돌파한 결과물” 평가

슈왈제네거가 파인스타인과 손을 잡은 것은 공화·민주 양 당 내부에서 일었던 공채 발행에 대한 거부감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주의회 의원들은 현재 예산 적자도 만만치 않은데 공채로 부채를 더 늘리면 정부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민들의 이해와 직결된 ‘물 문제’에는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못한다. 대신 주정부의 빚이 늘어나는 것을 주로 공격하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지난 1986년 캘리포니아 주에 5년 대가뭄이 닥쳤을 때 주지사 피트 윌슨은 지금처럼 서두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는 계속된 가뭄으로 심각한 식수난을 겪었으나 윌슨 주지사는 5년을 버티다가 1991년에서야 가뭄 재해를 선언했다. 그런데 슈왈제네거가 2년 만에 가뭄 선언을 하고 공채 발행 얘기를 꺼내는 것은 너무 조급한 것이 아니냐고 이들은 비판한다. 여기에는 남캘리포니아의 물탱크 역할을 하는 북캘리포니아의 주민들이 “남쪽을 위해 매번 왜 우리만 희생해야 하느냐”라는 불만도 들어 있다.

그래서 오는 11월 총선에서 물 공채 발행이 투표용지에 안건으로 등재 되더라도 주민 동의를 쉽게 얻어내지 못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동성 결혼과 미성년 낙태 허용, 그리고 가축이나 애완동물 거세 허용 등 민감한 법안이 함께 올라 물 공채 발행의 중요성이 희석될지도 모른다는지적도 제기된다.

이번 공화·민주당의 물 공채 공동 발의는 문제의 심각성 못지않게 슈왈제네거의 독특한 바이파티잔(초당파적) 리더십의 결실이라는 것이 언론들의 평가다. 지난 2003년 취임 직후부터 초당파적 정책 수행을 선언한 그는 ‘공화당 내의 민주당원’으로 통한다. 그의 이같은 초당파적 리더십이 파인스타인으로 하여금 쉽게 손을 잡을 수 있게 했다. 물을 다루면서 피만큼 진한 공감이 작용한 결과다.

슈왈제네거의 초당파 성향은 아내 마리아 슈라이버가 골수 민주당인 케네디 가문인 것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더구나 그는 최근“(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오바마 정부에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라고 말해 자신의 초당파적 성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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