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남한 보내 달라 했더니 3년만 참으면 통일 된다고 했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8.07.2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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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자서전 <고백>을 펴낸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시사저널>을 만나 또 다른 ‘고백’을 했다. 최씨가 처음 털어놓은 ‘3년 후 통일‘발언은 의미심장하지만, 그녀는 자세한 내막을 밝히는 데는 조심스러워했다.


ⓒ시사저널 황문성

최은희씨는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상록수> 등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힘들다. 영화만큼 삶도 극적이다. 남한, 북한, 미국을 전전했던 그녀는 두 남편의 아내로, 자신이 낳지 않은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아왔다. 첫 남편은 촬영감독 김학성씨였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말 많았던 생애만큼이나 갖가지 소문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신상옥 감독과 사랑을 나눌 때 숱한 화제를 뿌렸고, 그와 함께 납북되었을 때는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특히 북한에서 살았던 8년 동안 그녀의 삶은 꼬일 대로 꼬였다.

그녀가 지난해 11월 자서전을 냈다. 한국전쟁 때 헌병 장교에게 성폭행을 당한 치부까지 까발리면서 자서전을 낸 이유는 책 제목처럼 ‘고백’을 위해서다. 고백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오해와 억측을 바로 잡고자 한 것이다.

내년에 80 고개에 접어드는 산수(傘壽)를 맞는 그녀를 지난 7월22일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만났다. 최씨는 인터뷰를 시작하자 대뜸 자신의 인생에서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 그렇게 왜곡되었느냐고 묻자 “신감독과 나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라고 답변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살려가며 자신의 삶과 혼신을 바쳤던 영화, 뜻하지 않았던 북한 유랑 생활 등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김정일에 의한 납북이,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 감독을 북한으로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나?
북한은 모든 일에 치밀한 작전을 꾸민다. 그런 면을 볼 때 낙후된 북한영화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신감독을납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신감독 납치가 여의치 않으니까 나를 먼저 납치한 것 같다. 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신감독은 나를 찾겠다고 홍콩까지 왔다가 납북되었다.

1978년 1월 내가 납북되어 울고 불며 다시 남한으로 보내달라고 여러번 떼를 쓰니까 김정일이 “3년만 있으면 통일되는데 그것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다. 통일되면 식구도 만나도 신감독도 만날 수 있는데 그때까지만 참으라고 했다. 또 여러 해가 지난 후 김정일은 영화배우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는 물론 신감독까지 (북한으로) 곧 데려올 것이라고 했다. 혹시신감독까지 납북하려는 것인가 싶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 납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결국, 신감독을 납치해왔다.

영화산업 부흥이 신감독을 납치한 목적이었다면 김정일은 왜 그를 5년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었는가?
(목소리를 높이며) 항간에는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가 무성한데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는데, 일일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신감독은 좌익 사상을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니다. 영화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1·4 후퇴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이고, 성격도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일하는 타입이다. 내가 오죽하면 야생마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겠는가. 그런 사람이 모든 것을 감시하는 북한으로 월북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신감독은 북한에서도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했다. 네댓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갖은 고문을 받았다. 그러니 감옥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최은희씨를 바치기 위해 납치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내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긴 때여서 납치한 이유가 궁금했다. 김일성이 나를 탐하려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탈출한 것도 생각나고…. 아무튼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 아니다.

김정일을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가?
어디를 가나 접하는 질문이다. 내가 김정일을 제일 오래, 가까이에서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리를 강제 납북시킨 점으로 보면 인간성이 잔인한 사람이다.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점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이기도 하다. 결단력이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한다. 한마디로 쾌남아라고 표현할 수 있다.

1986년 북한을 탈출해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50만 달러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두문 불출했다. 1년쯤 지나자 신감독은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정부 기관의 만류가 있었지만 신감독은 죽어도 좋으니 일을 하겠다고 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사실 그 당시 김정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당시 북한에 짓고 있던 영화촬영소도 완공되었으니 북한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당 간부를 통해 전해왔지만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과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어졌다.

1999년 영구 귀국한 후 불편한 점은 없는가?
불편이 있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있는가. (한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미국에서의 생활 여건은 좋았지만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귀국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말은 통하지만 의사 소통이되지 않아 답답하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외국 여성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한 번은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북한의 지도원과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요르단 여성이었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모르지만 교사 자격으로 북한에 와 있다고 들었다. 나도 그렇고 외국 여성도 억류되어 있다 보니 피차 간 사람이 그리웠다. 그러나 감시원들 때문에 오며 가며 스쳐가는 정도였지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 김정일(오른쪽)에게 불려가 피랍 3년 만에 상봉한 신상옥ᆞ최은희 부부(왼쪽). ⓒ연합뉴스

나는 북한에서 소일거리로 뜨개질을 했다. 재킷도 만들어 입었는데 그것이 좋아 보였던지 그 외국 여성이 다른 사람을 통해 구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갖고 싶어하는 눈치여서 모자를 떠서 건네주었더니 고맙다며 손수건 두 장을 답례로 보내왔다. 일본·프랑스 여성도 볼 수 있었다.

북한이 왜 외국인을 납치해 억류한다고 생각하는가?
(목소리 톤을 높이며) 왜 새삼스럽게 북한 이야기를 자꾸 묻는가. 북한에 대해 아무리 말을 해도 정치인조차 이해를 못해서 답답하다.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하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반인들의 대북관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답답하다. 얘기는 하고 싶은데 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되니 답답하다. 다만 6·25 때 전쟁과 인민군을 경험한 세대가 아직 살아 있는데, 이를 뒤집는 대북관이 팽배하니 당황스럽다. 남북한 정부와 고위 정치인을 모두 접해본 사람으로서 현재 국내의 반공 사상이나 대북관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후손에게 왜곡된 진실을 남기는 것 같아 분통이 터진다. 내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여러 정치인을 만나 북한의 실상을 전해주면 믿지 않는다. 답답한 노릇이다. 북한은 결코 겉만 봐서는 모르는 곳이다.

요즘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하나?
얼마 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부부들이 자주 보였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외화였다. 물론 우리 영화가 아니고 오락영화이지만 과거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 중년들이 영화를 보러 온 것 같았다. 중년을 위한 영화가 없을뿐이지 중년들이 영화를 멀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고품질의 영화를 만들면 우리 영화계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영화 자체가 아니라 관객을 보고 느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는 <강철중> <크로싱><밀양> 등 문제작들을 보았다.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나?
과거에 만들었던 영화 중에서 좋은 작품을 리메이크해서 다시 선보이고 싶다. 예를 들면 1963년 작 <로맨스 그레이>의 시나리오는 지금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년들이 감동을 느끼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우리 영화계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얘기해도 먹혀들지도 않을 뿐더러 욕이나 먹지 않겠는가. 얘기한다고 해서 충고를 받아줄 영화인이 없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영화계 선후배 관계가 다 끊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할 생각은 있나?
굳이 출연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우리 같은 노배우들이 설자리가 있는가. 모두 젊은 층을 대상으로 만든 자극적인 영화들뿐인데 말이다. (웃음)

남은 생애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신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담은 박물관을 건립하고 싶다. 신감독은 기획·감독·제작·촬영·편집까지 1인 5역을 해낸 감독이다. 신감독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사단법인 ‘신상옥 감독 기념사업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를 통해 1950년대부터 이어져온 신필름의 역사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신감독은 생전에 <칭기즈칸>등 4~5개 시나리오를 영화로 제작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신감독의 꿈을, 아들(신정균 감독)을 통해 이루고 싶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웃음).

 최은희는 누구인가

1930년 11월9일 경기 광주에서 태어나 1943년 경성 기예학교를 다니던 중 극단 ‘아랑’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극배우로 활약했다.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현재까지 1백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한국 영화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전쟁 중 피란처인 부산에서 연극을 공연하다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1954년 결혼했다. 1978년 1월14일 북한으로 납북되었고 남편 신감독도 그해 7월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해외 영화제 수상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서 남편과 함께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이후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영화인으로 활동해오다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신감독은 2006년 지병인 C형 간염으로 사망했다. 현재 서울 방배동에서 사촌동생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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