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뿌리 질긴 ‘피와 뼈’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08.1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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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우리학교>, 이즈츠 <박치기> 등 영화 속에 비친 ‘재일한국인의 삶’


일본에는 여전히 한국인의 피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중에는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한 경우도 있다. 귀화를 선택한 사람들 대다수는 한국인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그만큼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를 간직하면서 한국인으로, 혹은 조선인으로 살아간다.

한국, 그중에서도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재일한국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가깝지만 멀고 먼 나라’ 일본에서 귀화도 하지 않고 한국인 혹은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애환과 아픔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온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재일한국인의 이야기를 다룬 몇 편의 영화는 그들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김명준 감독의 <우리학교>(2006년)와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2004년),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년), 그리고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박치기>(2004년)가 그들이다. 이 작품들은 한국인 감독의 다큐멘터리(<우리학교>), 재일한국인 작가의 원작을 재일한국인 감독이 영상으로 옮긴 극영화(<피와 뼈><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일본인 작가와 감독이 만든 재일한국인 이야기(<박치기>) 등으로 내용이나 제작진이 각각 다르며 재일한국인의 모습을 나름의 시각으로 그렸다.

1950~1960년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 배경 다양

이들 작품은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2000년 이후에 나온 것들이지만,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50~196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시대적 배경을 따라가며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재일한국인의 역사와 그들의 삶과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가장 먼 시대 배경을 다루고 있는 <피와 뼈>는 재일한국인 작가인 양석일씨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로 온 재일한국인 1세대 김준평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한국계로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가 오사카의 괴물로 불리던 김준평 역을 맡아 그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고 강압적인 생존 방식을 그려냈다. 영화는 김준평의 이야기를 한가운데에 위치시키고 있지만, 주변 인물의 삶을 통해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의 재일한국인의 고단한 처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당시 재일한국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생존이었다. 생존을 위해 김준평은 어묵 공장을 차렸고,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던 재일한국인들은 김준평의 상습적인 폭력과 과도한 노동 시간에도 그의 어묵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생존 수단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그 안에서 돈과 일자리는 권력이었다. 권력을 틀어쥔 김준평의 악행이 확대되고 반복되어도 커뮤니티에서 그의 지위가 변하지 않은 것은 ‘조센진’들이 이곳을 탈출하더라도 일본 사회의 다른 곳에는 빌붙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뿌리에 대한 그들의 고민도 잘 나타난다. 김준평은 한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과 반목하고 끊임없이 일본 여자를 끌어들여 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며 뿌리를 부정하려 든다. 하지만 결국 일본인 첩에게서 얻은 아들과 북한으로 가서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면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뿌리로 회귀하고 마는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뿌리로의 회귀는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청년 찬명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재일한국인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간다. 복역을 마친 그는 결국, 북한행을 택하고 그의 소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찬명은 그 시절 북송선을 타고 뿌리를 찾아간 재일한국인을 대변한다.<박치기>는 사상과 이념, 가치관이 갈등하고 충돌하던 변혁기인 1968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 고등학교와 조선인 학교 학생들의 대립을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일본인 남학생의 인식 변화를 보여주며 그 시절의 순수함을 회고하지만 사랑 이야기를 걷어내면 당시 재일한국학생의 치열했던 투쟁의 과정이 녹아 있다. 한복을 입고 등하교한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여학생과 이들을 보호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남학생들의 모습은 치열했던 당시의 대립을 잘 보여준다.

조선인학교 다룬 <우리학교>, 국내 개봉 다큐멘터리 중 최다 관객 동원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1980년대에 별 다른 목표 없이 살아가는 한 불량 청춘의 이야기다. 강충남은 한국인 동창이 운영하는 택시회사에서 일하며 가라오케를 운영하는 어머니에게 빌붙어 사는 불쌍한 청춘이다. 유일한 목표가 여자 꼬드기기인 충남은 결국 어머니 가게의 종업원인 필리핀 여성 코니와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는 코미디를 주 정서로 끌어가면서도 당시 재일한국인의 사회적 계급과 고민을 담아내고 있다. 충남의 어머니는 필리핀 여성과의 교제를 묵인하면서도 결혼은 절대 반대하고, 충남의 또 다른 동창은 야쿠자와 손을 잡고 택시회사 사장인 친구를 등쳐먹는다. 빚에 쪼들리며 조선인은 싫어하지만 충남은 좋아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일본인 친구는, 기존 가치관과 인간적 동료애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충남은 1980년대 들어 변화한 재일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생존은 더 이상 첫 번째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지는 못하고 있다.

7만5천명 관객 동원으로 국내 개봉 다큐멘터리 중 최고를 기록한 <우리학교>는 홋카이도의 조선인 학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3년5개월을 이들과 동고동락한 김명준 감독이 잡아낸 날것의 기록이기 때문에 2000년대를 살아가는 재일한국인의 삶의 변화와 이들을 유지시켜주는 힘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재일한국인 부모와 학생들이 왜 일본인 학교에서의 정규 교육을 포기하고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졸업 후 대학 수험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 대안 학교인 조선학교를 선택했는지, 그들은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조선학교의 모습은 생각 밖으로 폐쇄적이지 않다. ‘남조선’ 출신의 김감독에게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털어놓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상 교육에 함몰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존의 선입견을 완전히 부순다.

학생들은 말과 글을 배우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깨달을 뿐이다. 학생들은 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할지언정 남한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그저 남한을 방문하고 싶어도 왜 북한 국적을 버리지 않느냐는 대사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북으로의 졸업 여행에 동행하지 못한 일에서 감독이 남북 분단을 체감하듯, 조선학교 학생들도 남과 북을 모두 방문할 수 없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이 재일한국인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태평양 전쟁 이래 식민지 출신의 2등 시민이었고, 분단으로 교민들끼리 체제 경쟁을 하고, 민족적 정통성 유지라는 이중 삼중의 과부하가 걸리는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현재를 살아가는 재일한국인들은 여전히 열도의 일등 시민이 아니기에 그 치열함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치열함에서 남과 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잣대로 재단한 사상적 갈등은 이제 걷어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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