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 는 재벌들의 위험한 ‘무한 도전’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08.2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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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의 ‘문어발’ 경영이 되살아나고 있다. 덩치를 키우기 위해 인수ᆞ합병에 주력하면서 30대 그룹의 계열사 수와 부채는 3년 전보다 각각 27%, 38% 증가했다. 일부는 입시 학원ᆞ초밥 사업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재벌들의 문어발 경영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온 기업들을 호시탐탐 노리며 덩치 키우기를 시도하는 것은 기본이다. 돈이 될 만한 사업이면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초밥 장사에 손을 대는 대기업이 있는가 하면 입시 학원을 계열사로 거느리는 대기업도 있다. 특히 도너츠 가게나 스파등 중소 업종에도 다리를 걸치면서 영세 자영업자들의 터전까지 잠식하고 있다.

재벌 기업들은 무분별한 사업 확장에 대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위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무리하게 인수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자금난을 겪으며 흔들리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연구개발(R&D)은 외면한 채 알짜 기업을 챙겨 외형 성장에만 치중해온 재벌기업들의 악습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항공 사업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이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현재 중국 하이난 항공그룹 계열사인 ‘그랜드 차이나 익스프레스 항공’의 지분 인수를 추진 중이다. CJ투자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 진출한 데 이어 항공 사업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측은 “그룹 규모에 비하면 새로운 사업의 영역은 미미한 수준이다. 차세대 동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해달라”라고 말했다.

“대마불사론 때문에 맞은 외환위기 그새 잊었나”

그러나 전문가들은 제조업체가 금융업에 이어 항공 사업에까지 업종을 다각화하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현대중공업은 전형적인 제조업체다. 이 회사가 금융업에 진출한 것도 이례적인데, 항공기 제조가 아닌 서비스 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본다. 인수·합병의 기본 원칙은 업종 간 시너지 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이지만 현대중공업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우리 기업들이 이렇게 문어발식 경영을하다가 외환위기 사태를 맞았던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대한전선도 최근 도급 순위 99위인 명지건설과 40위인 남광건설을 잇달아 인수했다. 지난 2002년 무주리조트 2004년 쌍방울(현 트라이브랜즈)을 인수한 데 이어, 건설업에도 진출한 것이다. 이 덕분에 대한전선의 재계 순위가 4월 말 기준으로 30위로 뛰어올랐다. 이 회사 역시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 차원에서 나선 일이라고 군색한 해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문어발식 기업 인수로 몸집을 키워 ‘재벌 흉내’를 내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특히 대한전선은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 돈을 대준 뒤 1차 부도가 나면 인수 작업을 벌여 뒷말이 나오고 있다.

CJ그룹은 지난해 강남의 대형 나이트클럽에 지분을 투자했다가 논란을 빚자 급히 회수한 바 있다. GS그룹은 지난해 주력 산업과는 무관한 도너츠 체인점 ‘미스터 도넛’을 열었다. 신세계·롯데 등 주요 백화점 그룹은 본점에 고급 스파를 운영하기도 한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입시 학원인 종로학원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현대종합상사는 회전초밥 사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현대상사는 지난 2003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회전 초밥집인 ‘미요젠’과 하우스 맥주집인 ‘미요센’을 오픈했다. 그러나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2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최근에는 한 재벌 기업이 관련 사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사업 다각화는 기업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권장해야 한다. 하지만 업종이 문제다. 주력 업종과 연계시켜 기업의 파이를 키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대마불사론 때문에 한국 경제가 곤욕을 치렀는데 또다시 그런 상황으로 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일부 기업들은 무리한 M&A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최근 유동성 위기설로 타격을 받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그렇다. 금호그룹은 한때 대우건설, 대한통운 같은 기업에 대한 초대형 M&A를 잇달아 성사시켜 “택시가 버스를 잡아먹었다”라는 평가를 들으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현재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당장 내년 9월까지 대한통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해야 할 1조2천여 억원을 마련해야 한다. 대우건설을 인수할 당시 투자자들에게 걸었던 3조원 규모의 풋백 옵션(매도 선택권)도 내년 11월로 다가와 유동성에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다. 더구나 대우건설의 미분양 물량이 의외로 많아 자금 회전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 그룹 부도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우량 기업인 줄 알고 먹었다가 모기업까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금호·유진 그룹 등 M&A 후유증으로 흔들

유진그룹의 상황도 금호와 별반 차이가 없다. 유진그룹은 최근 하이마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유동설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유진 역시 자회사 합병과 유휴 자산 매각 등을 골자로 하는 경영 개선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도 근본적인 대응책은 아니어서 유진의 자금 사정을 둘러싸고 여전히 악성 루머가 나돌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공기업 민영화가 본격화되면 재계의 출혈 경쟁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기업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면 한판 싸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을 먹느냐에 따라 재계 판도나 위상이 달라져 기업마다 결사항전의 전의를 다지고 있다.

공정위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초 기준으로 상위 10대 그룹의 계열사 수가 4백59개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5년 전 3백10개사에 비해 무려 45%나 증가한 수치다. 30대 그룹으로 범위를 넓히면 이런 양상은 더욱 심하다. 재계 전문 사이트인 재벌닷컴이 국내 30대 재벌 소속 계열사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계열사 수가 지난 2005년 3월 6백64개에서 올해 843개로 27%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M&A에 필요한 자금을 외부 차입에 의존하다 보니 부채 또한 급증했다. 30대 그룹 계열사의 부채 총액은 4백3조4천4백20억원에서 올해 5백56조7천3백60억원으로 38%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권영준 교수는 “상당수의 재벌 기업이 외부 차입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있다. 과거 재벌들의 ‘문어발 악몽’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M&A 호재를 지닌 회사들의 주가가 하락하는 것도 시장에서 재계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고 보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다”라고 강조했다.

▲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지난 7월 말에 개최한 기업 설명회. ⓒ연합뉴스


익명을 요구한 산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지난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국내에서 일어난 M&A를 분석한 결과 68%가 혼합적 유형을 취하고 있다. 혼합적 M&A가 많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업 연관성이 없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가 폐지될 경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나마 재벌들의 ‘문어발 확장 본능’을 견제할 장치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김건호 경실련 경제정책팀 부장은 “출총제의 실효성이 없어졌다는 재계의 주장에 일정 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무조건 폐지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밝혔다. 재벌 기업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는 중소기업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상희 중소기업포럼 대표는 “IMF 경제 대란의 주 요인은 재벌들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그로 인한 중소기업 시장의 몰락이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규제 완화는 오로지 대기업만을 위한 정책이다. 중소기업도 함께 살 수 있는 정책적 배려가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재계에서는 ‘문어발’이라는 표현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불가피한데 덩치 키우기를 마냥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재계의 주장이다. 박규원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글로벌 경제의 최근 이슈는 규모다. 규모가 커야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 할 수 있다. 시각을 넓혀야 한다. 주력 사업과 무관한 업종을 인수한대서 무조건 ‘문어발’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공정위측도 비슷한 의견이다.

음잔디 기업집단과 사무관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 공정위의 입장이다. 출총제와 같은 규제가 그동안 많이 완화되어 9월 정기국회에서 폐지가 된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성장 동력 확충이라는 명분 아래 사업을 확장하는 기업들의 양태가 외환위기 직전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움직이는 기업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는 관치 경제가 재연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시장 질서를 해쳐가며 무리하게 잇속을 챙기는 문어발 경영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강력한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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