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 더한 색색 사과의 유혹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08.2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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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조각가 최성철의 ‘파리스의 사과’전 / 생동감 넘치는 색으로 탐스러운 조각 선보여

▲ 전에 선보인 높이 90cm 사과들과 2m40cm 크기의 첼로 3점으로 구성된 (맨 왼쪽과 왼쪽). ⓒ선 갤러리 제공

오늘의 조각에서는 장인적 의미의 손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언제부터인지 조각가의 작업실은 흙 등의 각종 재료와 공구들로 가득 찬 풍경이 아닌, 디자인실과 같은 도면 위주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디자인과 제작이 철저히 분리되어 조각가는 도면에 충실하고, 제작은 석재 공장이나 주물 및 금속 가공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의 조각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예술가의 역할은 언제나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공공미술의 수요가 커지면서 스테인리스 스틸이 가장 주목받는 재료가 되었지만, 그 가공은 작가 개인이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공장과의 분업이 불가피하게 된 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현상은 조각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장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판화의 경우 작가와 인쇄기술자가 분업적으로 협동해나가는 대표적인 장르다. 특히 하이테크의 비중이 커져가는 미디어아트에서의 분업화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작가의 몸(손)을 거친 제작 과정에서 과즙처럼 분비되는 효과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또한 현실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어쩌면 기술적인 부분의 비중이 커질수록 손에 대한 향수도 더 커지면 커졌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그림으로 치자면 필치이며, 음악으로 치자면 음색인 것이다.

작가들 역시 이런 미세한 사항들을 자각하고 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좀더 체험적인 것, 즉 ‘손맛’을 극대화하려는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색채 조각가로 알려진 최성철의 작품 세계가 좋은 예다. 최성철 조각의 요체는 색이다.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의 향연이야말로 작가만의 유니크한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조각에서는 색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한 편이다. 재료의 물성이 조각 언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기 때문에 물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전통은 오늘의 조형에서도 영향력을 확고하게 유지해오고 있다. 물론 언제부터인지 조형의 일반적 양상에서 자유로운 감성적 분출과 표현을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흐름 덕에 색에 인색한 현대조각이 채색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색에 대해 소심하고 조심스럽지만 말이다.

채색이 형태와 결합해 ‘언어 체계’처럼 표현돼

이러한 조각의 조형 현상 속에서 최성철의 조각은 색에서만큼은 극한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 많은 조각가가 자신의 조각에 채색을 하고 있지만 그처럼 적극적으로, 그리고 탐구적으로 채색을 즐기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강렬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한 그의 색채 감각은 여타의 화가들 화면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내용들이다. 그의 조각에서 채색은 복합적 기능을 한다. 단순한 구성과 장식은 말할 것도 없고, 형태와 결합된 표현들, 나아가 메타 언어 즉 조각 자체를 해석하는 언어 체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각 작품의 표면에 가해진 작가의 그림을 캔버스에 전개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으로 회화적 표현이나 구성, 그리고 완성도 면에서 화가의 것과도 충분히 견줄 만하다. 회화적 감각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평면의 그림을 단순히 조각의 표면에 입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는 평면에 그려질 것과 입체에 그려질 것의 공간적 차별에 따른 구사 능력은 물론이고, 아울러 조각 공간을 적절히 해석하는 능력이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최성철의 진가가 돋보인다 할 수 있다.

최작가는 롯데 애비뉴엘 갤러리에서 개인전(<파리스의 사과> 전, 8월15~27일)을 열고 있다. 작가의 전시장에 들어서면 실물보다 약간 큰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100개의 사과를 만나게 된다. 빨강, 진홍, 노랑, 초록 등 4가지 색으로 상반구가 채색된 사과 100개로 연출된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짜릿한 감흥을 느끼게 한다. 산뜻하고 강렬하며 탐스럽기까지 한 사과의 재현은 문자 그대로 실물의 사과보다 더욱 관능적이고 매혹적이다. ‘다다익선’이라 했던가. 그 개수가 많아질수록 식상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흥의 강도가 더욱 짙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 개별적 대상의 문제를 넘어 조합과 구조의 문제가 된다. 100개의 사과가 하나의 율동적 질서 내지는 집합체가 생성해내는 시각 질서로 환원되어 있는 것이다.

▲ 사과 100개로 구성된 . ⓒ선 갤러리 제공

‘무표정’한 스테인리스에 활력 불어넣어

스테인리스 표면에 채색을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채색 면을 먼저 갈아내 표면에 미세한 흠집을 내야만 도료의 견뢰도가 보장된다. 그 상태에서 작가가 정성스럽게 하나하나를 수작업으로 채색해나가는 것이다. 붓을 잡고 채색하는 바로 그 과정을 작가는 가장 행복하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채색을 함으로써 비로소 질료의 차원을 넘어선 의미의 차원으로서의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채색이 대부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의 재료와 물성을 있는 그대로 살리는 것 또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작품에서 강조되는 것은 물성의 차원을 넘어 개체들의 전체적 구성과 배열이 주는 경험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이번으로 모두 아홉 번의 개인전을 갖는 최성철의 이력도 조각계에서는 흔한 것이 아니다. 조각 개인전 한 번이 그림 개인전 두세 번과 맞먹는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동안 꾸준히 개인전 발표를 해왔다는 사실은 창작 에너지와 진지한 작업 태도의 결실임을 확인시켜 준다. 작가가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돌아와 석조에 채색을 할 때만 해도 상당히 낯설게 다가왔다. 전통 조각의 이단자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그가 단순히 폭넓은 방법에 의한 채색만을 강점으로 하는 작가에 머물렀다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바로 거기에 덧붙여 작가는 소재와 재료, 색채 표현 등을 통해 신화적·상징적 문맥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파리스의 사과’라는 타이틀에서 암시하듯 우리 보편적 인간 내면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은밀히 탐구하고 있는 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주제와 메시지 해석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하더라도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의가 적지 않다. 이렇듯 작가가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일 때마다 인상적인 복합적 표현 양식을 제시했으며, 그것은 묘하게도 시대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것은 작가가 상당 부분 다른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거나 혹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예리하게 통찰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거리에서 흔히 보는 조형물의 대부분이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작가의 노력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그것들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즐거움을 주는 활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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