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은 지금도 학계에 판치고 있다”
  • 조 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8.08.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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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 관계사 분야 중점 연구해온 이희진 박사
ⓒ시사저널 황문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 국민은 한목소리가 되어 저항한다. 그런 나라에서 식민사학이 버젓이 살아남아 역사학계와 교과서를 점령하고 있다니…. 역사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학이 틀을 세운 한국 고대사를 아직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역사학자가 있다.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진단하며 <식민사학과 한국 고대사>를 펴낸 소장 사학자 이희진 박사를 만났다.

1963년생인 그는 고려대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던 중 역사에 빠져 사학까지 이수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서강대에서 고대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대 한·일 관계사 분야에 천착하면서 한국의 고대사 연구자들 중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는 자들이 주류로 인정받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식민사학이라면 국민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그런 목소리가 있어도 학계는 외면한다. 학계나 전문가 집단에서 나서야 하는데, 기득권을 장악한 집단이 봉쇄해 버리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유명무실하고 대학 내에서 그런 목소리를 냈다가는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

일제에서 벗어난 지 63년이 지났는데도 뿌리가 더 단단해졌다는 것인가?
그렇다. 식민사학이 어떤 부분이라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금까지도’ 학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 추종자들의 행태는 일반적인 기득권층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들 대다수는 무슨 투철한 신념 같은 것이 있어서 식민사학을 심는 게 아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손쉽게 기득권을 얻고 안주하려고, 또 특권을 잃지 않겠다는 사리사욕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이다.

대학 내 수많은 신진 학자들이 나서면 개선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교수 밑에 들어간 학생들은 교수가 원하는 추종자이기도 하다. 학생은 학생대로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자기 선생의 논리를 비호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학생들을 필요로 하는 교수들이 제대로 연구하고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을 살려두겠나. 언젠가 자신들의 ‘비리’가 다 들통날 텐데. 역사를 가르치는 현장이 교주와 신도 관계처럼 되어 있는데 새로운 사실이나 교훈을 찾아낼 수 있겠나. 이런 풍조에서는 검증을 강화하겠다는 발언조차도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식민사학의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황국사관·식민사관이 과거에 있었던 생각쯤이라면 왜 욕하겠나. 역사학이 추구하는 대로 미래의 교훈만 찾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들을 가지고 백성을 등쳐먹는 짓에 악용했기 때문에 욕하는 것이다. 식민 지배를 위해 사실과 다르게 역사를 조작하는 논리를 별다른 근거도 없이 좇아가고 있다면 식민사학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또, 온갖 억측까지 동원해서 그런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행위도 포함되어야 한다.

고대사에 중점을 두고 식민사학을 다룬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화라는 정치적 명분에 힘을 보태기 위해 역사를 조작했다. 조선인들에게 ‘너희는 조상 때부터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할 만큼 못난 족속이었으니 현실을 받아들여라’라는 메시지를 머릿속에 구겨넣고자 하는 정치적 요구에 맞추어진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런 밑그림에서 탄생한 식민사학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사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가 적은 고대사 분야는 각 시대사 가운데 가장 조작하기 쉬운 분야일 뿐 아니라,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분야다.

일본에서도 식민사학이 주류인가?
일본에서도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관을 설치했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꼴통’ 계파의 설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계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계파가 일본 고대사 학계의 주류 행세를 하는데, 그 계파의 거두 스다 소키치는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비판한 사람이다. 한국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황국사관에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양심적 학자로 비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알아보지 못하고 빠져드는 점이 문제다. 지금 한국에 뿌리 박고 있는 식민사학은 바로 이 계열이다.

스다 소키치의 진짜 의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또한 식민사학자일 뿐이다. ‘황당한’ 것만 빼자는 정도일 뿐 여우같이 일본 고대사 기록의 전반적인 흐름은 인정한 것이다. 남들에게 내세우지 못할 만큼 창피할 정도의 과장과 왜곡을 스스로 걸러내는 척이라도 하자는 의도인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철저히 무시해 한반도의 고대 국가 건립 연대를 늦추었다. 한국의 원로 식민사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주장에 편들 수도 있겠다.
그들도 이런저런 기고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거나 ‘민족 정기’를 말한다. 그런데
‘민족성’이라는 주제에 들어가면 그 색깔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자기들이 믿고 싶어하는 역사를 국제 사회에 들이미는 일본과 다름없이 ‘보신’을 위해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이론’에 기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내 식민사학자들이 특별히 일본에 충성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배운 대로 우기는 것이 세상 진리의 전부인 줄 아는 버릇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다.

그들을 방조하는 세력이 있는가?
이들에게 연구 기금을 제공하고 학회지 발간을 비롯한 각종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뭘 모르니 받아 쓰기만 하는 격이다.
논쟁은 할 수 있어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겠다.
책을 내면서 이야기한 것은 ‘빙산의 일각’보다 적은 ‘새 발의 피’다. 사람들을 조종해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은 행태를 두고 싸우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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