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 양성하려면 기부 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 김세원 편집위원 ()
  • 승인 2008.08.26 16:0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과학기술원에 ‘전 재산’ 쾌척한 류근철 박사 / “모교인 경희대도 이해할 것”
ⓒ시사저널 황문성

예순세 번째 맞는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월13일, 무더위와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버린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발신지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베이징이 아니라 대전. 원로 한의학자가 평생 모은 5백78억원 상당의 재산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8월20일 오전, ‘국내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 쾌척’이라는 기록을 세운 류근철 박사(82·모스크바 국립공대 종신교수)를 서울 광화문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10여 개나 되는 대형 벼루와 금강산 전도, 여인의 나상, 불상, 중국의 옥새, 목탁, 돋보기 안경, 회중시계, 항해용 나침반, 18나한상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고서들…. 류박사가 연구실로 쓰고 있다는 아파트의 거실은 어느 도시의 뒷골목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음직한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했다.

“이건 아주 귀한 책이에요. 17세기 초에 출판된 <동의보감> 목판본 진본이지요. 원숭이가 조각된 저 벼루는 청나라 건륭황제가 사용했다고 해요. 그리고 저기 여인 나상에는 많은 구멍이 뚫려 있죠. 보기에는 평범한 나부상(裸婦像) 같지만 사실은 혈자리를 표시해놓은 침구 실습용 조각이에요. 지금까지는 내가 관리해왔지만 이젠 모두 카이스트에 귀속될 물품들이지요.”

류박사가 가리키는 대로 거실 가득 놓인 애장품을 좇다보니 여러 종류의 저울이 눈에 들어왔다.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상 같은 골동품도 있었다. 하지만 왜 평범한 앉은뱅이 눈금 저울을 수집했을까 궁금해졌다. 한약재의 중량을 달려면 저울이 필요하기 때문일까 하는 짐작과 달리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이 저울들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갖다놓은 거예요. 저울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잖아요. 감정이 격해지거나 하면 저울을 보면서 가라앉히려고 애쓰지요.”

17, 18세기 유럽의 지성인들이 ‘바니타스’라고 하여 해골을 서재에 두고 보며 삶의 무상함을 되새기고는 했듯이 저울을 보며 감정의 치우침을 경계하고 삶의 균형을 잡아나간다는 류박사의 생활 철학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로 그가 카이스트에 기부한 재산은 서울 서대문역 인근 적십자병원 앞 빌딩(지상 5층, 지하 2층·시가 약 5백억원)과 경북 영양군의 임야 10만여 평(약 40억원),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 아파트(61평형·약 14억원), 탱화, 벼루, 동의보감 진본 등 골동품 100여 점 (약 24억원) 등 5백78억원에 이른다. 부인 명의로 되어 있는 서울 송파구 아파트 한 채를 빼면 사실상 그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기부한 재산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빌딩을 판 돈으로 충남 연기에 건설되고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에 땅을 사서 KAIST 세종캠퍼스를 세우고 나머지 돈으로는 경북 영양의 산 30만㎡(약 10만 평)에 과학기술인을 위한 휴양관과 연구 시설, 과학유공자 묘역을 조성하기로 학교측과 합의했다. 노벨상 수상자나 국가 유공과학자, KAIST 발전에 기여했거나 많은 기부금을 낸 공로자들을 선정해 사후에 과학유공자 묘역에 묻히도록 할 계획이다. 학교측이 이들을 위해 1년에 한 번 공식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약속했다. 이 아파트는 KAIST의 게스트 하우스(숙소)로 활용하기로 했다. KAIST는 류박사의 공로를 기려 2012년 충남 행정중심복합도시에 들어설 KAIST 세종캠퍼스의 이름을 ‘류근철 캠퍼스’로 부르기로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거의 모든 언론에서 류박사의 기부 사실을 보도했다. 보도가 나간 이후 삶이 달라진 것이 있는가?
방송에 출연해 달라거나 책을 출판하자는 제의가 많이 들어와 좀 바빠지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기부금 약정식을 가진 뒤로는 잠도 잘 자고 아주 편안하다. 한 신문 사설에 나더러 ‘이 시대의 위인’이라고 했는데 과찬이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기부 문화가 활성화되어 개인이든 기관이든 과학기술 연구자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기부 결정을 한 뒤에 후회한 적은 없었나?
원래 돈에는 귀신이 붙어 있어 노여움을 잘 탄다. (웃음) 그러니 올바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해를 입는다. 최근에 부정 부패 혐의로 일가족을 데리고 외국을 떠도는 태국 전 총리의 사연이 보도되기도 했잖은가.

가족들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2남3녀를 두었는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있는 장남이 ‘우리 가문에서 10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일을 하셨다’고 말해주어 큰 힘이 되었다. 우리 가족들은 평소에 내가 기부하겠다는 말을 해왔지만 이렇게 덜컥 할 줄은 몰랐을 거다. 아내에게는 기부 액수를 절반으로 줄여 밝혔더니 약정식 이후에야 액수를 알고 깜짝 놀라더라. 자식들에게도 일부를 물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참 ‘꾸지람’을 들었다. (웃음) 아내는 고려대 의대 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했는데 아마 아내도 내 뒤를 따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류박사의 기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모교인 충남 천안 천동초등학교에 1억5천만원을 기부해 학생과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체육관과 게이트볼장 등을 건립했으며, 1990년대 후반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의료 시설이 부족한 국내 지방 각지를 돌면서 무료 진료 활동을 펼쳐 충남 천안, 경남 산청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류박사가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해 재산을 기부하기로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다. 틈틈이 사둔 부동산 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어떤 기관에, 어떤 방식으로 이를 전달할지 고민해 왔다. 국내 유명 대학을 두루 방문하며 기부 대상을 물색하기도 했다.

KAIST를 기부 대상으로 선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과학기술 발전이 필수적이고 미래의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책임질 곳이 KAIST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KAIST를 선택했다. 언론 보도가 나간 뒤 평소 알고 지내던 몇몇 대학 총장들이 전화를 걸어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섭섭함을 표시하더라. 모교인 경희대와 땀과 열정을 쏟았던 한의학계에는 미안하지만, 이런 내 뜻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내 돈은 내가 잠시 관리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아버님은 일본 관헌이 쏜 총을 맞고 도피하시고 어머니는 고문 후유증으로 몸져 눕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거지들이 밥 달라고 하면 자신의 끼니를 대신 내어 주실 정도로 심성이 고왔던 분이었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류박사는 요즘 젊은이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환경에서 성장했다. 류박사의 부모는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진원지로 유명한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결국 온 가족이 일본군에게 쫓기는 생활을 하게 되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가족을 염려해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다. 그래서 본명이 있는데도 호적에 한씨 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의 한성녀(韓性女)라고 기재되었다(잠시 류박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류박사가 어머니 방이라고 안내한 방에 들어서니 부모님의 영정과 본인이 직접 붓으로 쓴 좌우명이 눈에 들어온다. ‘효를 아는 것은 사람의 반열에 서 있음이요, 효를 행하는 것은 조상 어른의 복을 받음이라’. 아내의 수고를 덜기 위해 아파트에서 부모님 제사를 모신다는 류박사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업가들도 아마 평소 생활 속에서 불우 이웃돕기를 실천해온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적 액수를 기부하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떻게 수백억대의 재산을 모았는지 궁금하다.
특별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일단 은행에 저축하면 좀처럼 꺼내질 않았지. 옷은 주로 남대문시장에서 5천원, 1만원짜리를 사서 입었다. 한의원 운영과 특허 낸 제품 수출 등으로 번 돈으로 건물을 구입했는데 환자들이 많아 건물을 몇 번 옮기는 과정에서 재산이 불어났다. 그런 데다 건물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자산 가치가 급등했고. 그때부터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류박사가 자린고비처럼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된 삶을 산 것은 아니다. 그는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친구들과 함께 승마와 골프를 즐긴다. 여든이 되기 전에는 수상스키와 피겨스케이팅도 즐겼다. 명품에도 관심이 많아 틈틈이 한정품을 구입한다. 그의 기부 물품에 1억7천만원을 호가하는 파텍 필립 시계와 피아제 시계 같은 명품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다. 기자와 만난 날에도 류박사는 벤츠 로고가 들어간 벨트에 보석이 박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은 그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이라고 한다.

파텍 시계와 피아제 시계는 노벨상 수상자에게 넘기려고 한다. 그 시계를 착용하다 다음해 새로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면 또 넘겨주는 거지. 14일 기부금 약정식에서 약정서에 서명했던 순금 조각 만년필은 외환위기 전에 1만3천 달러를 주고 구입한 이탈리아의 오로라다. 1백97개만 한정 생산된 제품이라 지금은 4천만~5천만원으로 값이 뛰었는데 이것도 KAIST에 기증했다.

구멍 난 내의를 입고, 못쓰게 된 스키로 책장을 만들어 쓰지만 필요할 때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융통성과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개성이 그를 한국 최고의 기부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기부가 첫 번째 인생의 마침표가 됐다면 이제부터 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려고 한다. KAIST 특임교수로 있으면서 한방을 활용해 우주비행사들의 급상승·급강하로 인한 신경질환 치료 연구를 할 예정이다. 내가 ‘KAIST 발전재단’ 명예이사장이기도 한데, ‘KAIST사랑 세계화추진위’를 설립해 1천억원을 더 모금하는 일에도 앞장설까 한다.

류박사는 기부액으로도 국내 최고지만 대한민국 1호 한의학 박사이기도 하다. 1956년부터 개업의로 진료를 시작한 류박사는 1972년 세계 최초로, 침술로 제왕절개수술 마취에 성공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973년 경희대 한방의료원 부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동서의학중풍센터’ 설립을 주도해 처음으로 양방과 한방 협진을 시도했다. 1976년 경희대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한의사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후로도 미국·유럽·러시아 등과 교류를 하면서 한의학의 우수성을 국제 사회에 알렸고, 내부적으로는 한의학 과학화와 체계화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한의학에 공학을 접목한 ‘전자침술기’, ‘추간판 및 관절 교정용 운동 기구’를 개발해 국내와 미국·일본·캐나다에 7건의 특허를 갖고 있다. 공학으로 한의학 치료 효과를 입증하겠다는 그의 노력은 1996년 칠순의 나이에 모스크바 국립공대에서 의공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스크바 국립공대 종신교수직에 임명되는 결실을 가져왔다. 류박사는 러시아아카데미 의공학회 정회원이자 사단법인 원자력응용의학진흥협회 명예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