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표현 못할 이 야릇한 기분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8.09.0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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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스 하이, 달리기 30분 후부터 나타나는 환각 증상…개인 차 너무 커 학자마다 ‘설’ 달라
▲ 2008 한·일 관광교류의 해와 세계자연유산 등재 1주년 기념 제주마라톤축제 참가자들이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뉴시스

달리기를 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운 고비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비를 데쓰 포인트(death point)라고 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일순간 고통이 사라지면서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마치 마약을 한 것 같은 환각 상태에 이르고 묘한 행복감까지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장거리 육상 선수에게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또는 운동 하이(exercise high)라고 불린다.

이 명칭은 1979년 미국의 심리학자인 아놀드 맨델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가 쓴 정신과학 논문 ‘세컨드 윈드(second wind)’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3~5분 정도 지나면 몸과 마음이 운동에 적응되어 초기보다 편해지는 상태가 오는데, 맨델은 이 상태를 제2의 호흡이라는 의미의 세컨드 윈드라고 했다.

그는 또 세컨드 윈드 이후 한참 시간이 지나면 러너스 하이가 온다고 주장했다. 맨델은 논문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후 30분이 지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다리와 팔은 가벼워지며 리듬감이 생기고, 피로는 사라지며 새로운 힘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번째 야릇한 시간이 온다. 주위는 굉장히 밝고 색깔이 아름답고, 물은 빛나고 구름은 부드럽게 숨 쉬며, 내 몸은 이 세상에서 분리돼 수영을 하는 느낌이다. 만족감은 내 맘속 깊이 밀려와서 넘친다”라고 설명했다.

맨델의 논문이 발표된 후 러너스 하이를 경험할 수 있는 운동 시간과 강도, 방법 등에 대한 연구 결과가 쏟아졌다. 그 결과는 러너스 하이를 느끼려면, 중(中)강도 이상의 운동을 해야 하며 운동 시간은 적어도 30분 이상 지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신체에서 마약성 물질 분비되며 일어난다”

우리 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서 러너스 하이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 전세계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해왔지만,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게다가 러너스 하이는 운동하는 장소, 운동 시간, 운동량에 따라 개인마다 느끼는 정도가 천차만별이다.

현재까지는 뇌의 생화학적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학자들은 특히 뇌척수 등 중추신경계의 화학적 전달물질인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opioid peptide)에 주목하고 있다.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는 아편, 모르핀, 헤로인과 같은 마약과 유사한 구조와 기능이 있는 물질이다. 이 물질은 통증을 완화할 뿐 아니라 뇌의 기억력 향상과 감정 조절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타 엔돌핀(β-endorphine), 베타 리포트로핀(β-lipotropin), 다이노르핀(dynorphin)이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에 포함된다. 이런 물질이 분비되면서 러너스 하이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운동할 때 혈장 엔돌핀 수치가 증가한다고 보고된 바 있다. 평상시보다 운동할 때 5배 이상 그 양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호르몬은 일반 진통제보다 40~2백배 이상 강한 진통 효과가 있다. 마라토너가 장시간 달려도 발목이나 무릎의 통증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 호르몬의 진통효과 때문이다. 엔돌핀이란 ‘endogenous’(인체 내부)와 ‘morphine’(모르핀)의 합성어로 몸속의 마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베타 호르몬에 행복 호르몬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베타 엔돌핀 분비가 증가하지 않아도 러너스 하이가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베타 엔돌핀만으로는 러너스 하이를 명확하게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중추신경계의 또 다른 화학적 전달물질인 모노아민(monoamine)이 러너스 하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운동을 하면 대표적인 모노아민인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과 세로토닌(serotonin)의 농도가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 화학물질은 우울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물질의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경우 사람의 감정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 뇌가, 이 물질의 분비가 줄어들도록 조절하므로 우울증을 완화하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좌뇌-우뇌 이론도 시선을 끄는 연구 결과다. 좌뇌는 언어적 사고·분석적 사고·논리적 사고를 담당하고, 우뇌는 감정적 사고·공간적 사고를 관장한다. 좌뇌와 우뇌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하면 좌뇌와 우뇌에 혼동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우뇌에서 일어난 생각을 좌뇌로 가져와서 언어적인 표현을 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말을 더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좌뇌와 우뇌의 소통에 혼란이 생겼을 때 약 30분 정도 가볍게 조깅을 하면 이런 혼동이 해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동을 하면 상쾌해지는 것을 느끼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연구 결과마다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러너스 하이를 한마디로 증명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다만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와 모노아민이 상호 작용하면서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병이냐, 병이 아니냐

 

언제부터인가 운동 중독은 물론 일 중독, 휴대전화 중독, 인터넷 중독 등으로 병원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과 달리 이런 중독은 비물질 중독 또는 행위 중독이라고 불린다. 심지어 자극에 의한 중독이라는 의미의 자극 중독이라는 표현도 있다.

실제로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은 웬만한 자극에는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다양한 자극에 이끌리고 있다. 이종격투기와 같이 더 과격한 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폭력, 섹스가 빠진 영화는 흥행에도 실패하기 일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강한 자극으로 황홀감에 빠지면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으면 불안해하는 것처럼 금단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또 금단 증상을 없애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마약과 같이 강한 자극이 넘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중독에 빠지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독은 병적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마약이나 알코올처럼 물질에 의한 중독은 거의 예외 없이 병적 중독에 해당된다. 그러나 최근 불거지고 있는 비물질 중독의 경우, 중독의 원인이 되는 행위 자체가 긍정적인 측면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운동 중독이 대표적이다. 운동은 건강에 좋은 것임에 틀림없고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도 아니다. 따라서 이를 병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A는 대인기피 증상이 심해지면서 병적인 운동 중독에 빠진 경우다. B는 운동 중독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운동을 잘 활용하는 경우다. 중독이라고 해서 지레 경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의 일상 생활과 사회 생활 등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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