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줄 사람도 없는 잔치에 왜 떼로 몰려가나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8.09.0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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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당대회 기웃거리는 의원들, 국정 현안은 ‘나 몰라라’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2004년 미국의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던 한 정치인의 말이다. 당시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 자격으로 초청받았던 그는 전당대회 참관에 대해 “유용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유력 정치인과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사진 찍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를 대표한다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 특별한 배려도 없었다. ‘많은 돈을 들여 일부러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9월 정기국회 개원에 앞서 정치인들의 미국행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대선 후보를 확정짓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당대회에 참관하기 위해서다. 한·미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인사들이 총집결하는 자리인 만큼 인맥을 넓히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라는 것이 방미를 앞둔 이들의 기대였다. 향후 미국과의 의원 외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 가능한 인적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남의 잔치’에 떼를 지어 몰려갈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미국의 주요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쌓을 만큼 행사 일정이 느슨하지도 않고, 설령 자리를 함께하더라도 이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갖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의례적인 인사로 눈도장을 찍는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큰 행사에 굳이 경쟁적으로 참석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미국의 전당대회 참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공식 초청을 받는 경우다. 지난 8월25일부터 28일까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한나라당 박진·이병석·조윤선 의원과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 전병헌 의원 등 5명이 공식 초청을 받았다. 9월1일부터 4일까지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에는 박진·이주영·전여옥·이한성·조윤선·현경병 의원 등 한나라당 정치인들이 초청장을 받았다.

민주당 전당대회에 공식 초청 받은 의원은 5명

‘공식 초청’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민주당이나 공화당에서 한국의 특정 정치인을 지목해 초청했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민주당은 민주주의연구소(NDI)에서, 공화당은 국제보수정당연합(IDU)에서 외빈 초청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이들 단체에서 각 국가의 주요 정당에 초청장을 보내면 해당 정당에서 적절한 정치인을 초청 인사로 결정하게 된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지난 5월께에 당으로 초청장이 왔고, 여러 가지 사안을 감안해 초청 의원이 결정되었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공식 초청 방식은 2000년 전당대회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전당대회를 주관하던 민주당전국위원회(RNC)와 공화당전국위원회(DNC)는 밀려드는 외국 정치인들의 참석 요청을 교통 정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양당은 각각 NDI와 IDU에서 공식 초청장을 보내는 우회 방식을 선택했다.

민주당이 미국의 공화당 전당대회에 초청받지 못한 것도 이러한 초청 방식 때문이다. 공화당은 IDU에 가입된 정당에만 초청장을 보내고 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집권 여당인데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소외되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백악관을 비롯해 헤리티지 재단도 접촉했지만 끝내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 2000년에는 역시 집권 여당이던 민주당의 지도부가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외교통상부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괴문서까지 등장해 논란이 되었다.

공식 초청의 형식을 띠지만 제반 비용도 참가 의원측이 책임져야 한다. 현지에서 차량이나 통역 가이드 정도만 지원될 뿐 항공료나 숙식비 등은 각자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또 행사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고 좋은 좌석에 앉기 위해서는 별도의 돈을 더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비용은 국회에서 지원되는 것도 아니다. 국회사무처 국제국 관계자는 “당 차원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국회 예산으로 지원되는 것은 없다”라고 밝혔다. 한 참석 의원은 “의정활동비로 책정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당을 통한 공식 초청과는 별개로 의원 개별적으로 참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도 안상수·정병국·김재경·이혜훈 의원과 초선 의원 등 10여 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참관했다. 이들의 방미 목적은 워싱턴에서 미국 국무부·국방부·상무부 실무 관계자들과 만나 양국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데 있었다.




항공료ㆍ숙식비는 각자 알아서 처리해야

정병국 의원은 “미국에 가는 김에 민주당 전당대회를 직접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000년 초선 의원일 때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는데 이후 정치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초선 의원들에게 그런 경험을 갖도록 해주고 싶었다”라고 참관 배경을 설명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도 공식 초청을 받은 의원 이외에 공성진·진수희 의원 등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다. 친이명박계 내에서도 이재오 전 의원과 가까운 이들은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가 현재 유학 중인 이 전 의원과 만날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친이계의 좌장이었던 이 전 의원의 귀국 시기는 정치권의 관심사 중 하나다. 진수희 의원은 “우리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만나는 것이다”라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방미 시기도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국회가 새롭게 출범한 직후 미국의 전당대회가 열리다 보니 4년마다 똑같은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특히 이번 18대 국회의 경우 원 구성을 둘러싸고 석 달 가까이 공전을 거듭하다 어렵사리 개원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 당면한 국내 문제를 뒤로 하고 미국 방문길에 오르는 것이 과연 적절하냐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감사원장·대법원장 인사청문회, 쇠고기 국정조사 청문회 등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 산적해 있다. 여기에 가축전염병예방법, 공기업 민영화 관련법, 각종 감세 관련법 등 심의해야 할 주요 법안들도 줄줄이 널려 있다.

방미 중이던 박진 의원이 일시 귀국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도 시기 논란과 맞물려 있다. 박의원은 민주당 전당대회 개막을 앞두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선출 일정 때문에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공화당 전당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전당대회 참관을 통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면 이를 의원 개인이 아닌 국회나 정당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와 함께 ‘미국 짝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다른 국가들에 대한 의원 외교 역량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국회의원 스스로 대외 활동의 폭을 넓혀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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