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싸움하지 말고 진짜 씨름을 보여줘
  • 기영노 (스포츠 평론가) ()
  • 승인 2008.09.0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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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민속씨름, 전성기 되찾기 몸부림
▲ 최홍만 선수가 종합격투기 K-1 경기에서 발차기 공격을 하고 있다. ⓒ뉴시스

”피눈물이 나는 것 같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지난 2006년 9월10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벌어진 ‘프라이드 2006 결승전’ 번외 경기에서 프라이드 데뷔전을 치른 민속씨름 후배 이태현이 얼굴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난타를 당하면서 패하자 전 민속씨름 천하장사 이만기씨가 한 말이다.

이태현은 키 2m5cm, 체중 1백21kg의 거구 히카르도 모랄레스(브라질)를 맞아 초반에는 씨름 기술을 이용해 넘어뜨리기도 했지만, 발차기와 펀치 등이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태현은 결국, 모랄레스의 무릎 공격과 펀치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눈두덩이가 찢어지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기권을 하고 말았다.

당시 이태현은 성공적인 K-1 데뷔전을 치르고 승승장구를 하고 있던 최홍만에 이어 민속씨름 선수로는 두 번째로 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었었다. 이후 2m17cm의 원조 골리앗 김영현과 체중 1백70kg의 불곰 김동욱 등 민속씨름 스타플레이어들이 차례로 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었지만 최홍만 외에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

스타플레이어들이 격투기로 뛰어든 까닭

민속씨름 스타플레이어들이 왜 하나 둘 낯선 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어야 했을까? 지난 1983년 출범한 민속씨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스포츠답게 남녀노소 모두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았다. ‘천하의 만기’라고 불렸던 미남 스타 이만기, ‘씨름판의 신사’ 이준희, 그리고 키 2m5cm의 ‘인간 기중기’ 이봉걸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면서 프로 스포츠다운 스타성도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못지않게 강했다.

민속씨름이 열리는 체육관은 전국 어디를 가나 관중이 꽉 들어찼다. 미처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체육관 앞에서 표를 팔라고 아우성을 쳤다. 이들을 위해 주최측에서 마이크를 통해 현장 중계를 해주기도 했다.
급기야 민속씨름 팀 수가 8팀으로 늘어났지만, 1990년대부터 한두 팀씩 해체를 하기 시작하더니 19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대다수 팀이 해체되었다. 민속씨름단을 보유한 팀이 삼성, 두산, LG, 한화 등의 재벌 기업이 아니라 삼보, 청구, 일양양품 등 종소 업체들이다 보니 긴축 경영을 위해서는 당장 씨름단부터 없애야 했던 것이다.

굳이 외환위기가 없었더라도 씨름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 초창기 민속씨름은 화려함과 감동이 있었다. 한라급의 이만기가 화려한 기술로 거인 이봉걸을 쓰러뜨릴 때 씨름 팬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준희, 강호동, 손상주 등 수많은 테크니션들이 화려한 기술 씨름으로 팬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김정필, 김경수, 신봉민 등 1백60kg이 넘는 선수들이 모래판을 점령했다.

이제 백두급에서 활약하려면 1백50kg이 넘지 않으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 몸집이 커진 선수들은 아무래도 기술과 순발력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다. 경기 시간은 늘어지고, 지루한 무승부가 속출했다. 뒤집기, 되치기 등의 화려한 기술은 한 대회에 한 번 보기도 힘들어졌다. 5판3선승제의 결승전에서 내리 4판을 비기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1분, 아니 30초만 지루해도 TV 채널을 획획 돌리는 시대에 민속씨름은 마치 비대한 공룡처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쪼그라들었다.

팬들은 고개를 돌리고 팀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는 현대중공업, LG투자증권, 신창건설 3팀만이 남았다. 그리고 2004년에는 LG마저 씨름단을 해체했다. 그 와중에 민속씨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인 최홍만 선수가 2004년 말 K-1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민속씨름인 입장에서 볼 때는 최홍만이 ‘나 혼자만 살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최홍만은 소속팀인 LG가 해체를 선언했고, K-1측에서 거액(약 10억원)의 계약금에, 한 경기를 치를 때마다 억대의 개런티를 보장해주는 조건을 내걸고 유혹을 했으니 마다할 도리가 없었다.

▲ 2008 설날전국통합장사씨름대회 거상급 16강전에서 김수호 선수가 들배지기를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적극적인 경기 유도하는 룰과 새 마케팅 모색”

최홍만의 K-1 전향과 맞물려 신창건설 팀의 해체와 이태현의 격투기행은 다 죽어가는 민속씨름에 산소 호흡기를 떼는 격이었다. 8팀에 이르던 민속씨름 팀은 현대삼호중공업 한 팀만 남았다. 민속씨름의 부흥을 이끌던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씨는 “민속씨름은 내가 활약할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적극적인 경기를 유도할 룰 개정과 새로운 마케팅이 필요하다”라며 민속씨름 집행부를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신창건설 씨름단이 해체되면서 이만기씨를 비롯한 뜻있는 씨름인들이 ‘한민족씨름위원회’를 만들었지만, 한국씨름연맹은 한민족씨름위원회를 이적 단체로 규정하며 갈등을 빚어 민속씨름계에는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파벌 경쟁이 벌어졌다.

한민족씨름위원회와 한국씨름연맹의 갈등은 2005년 김천 장사대회에서 극에 이르렀다. ‘김재기 총재를 교도소로 보내라’는 현수막이 내걸리자 한국씨름연맹 집행부는 이를 ‘연맹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보고, 이 행사를 주도한 이만기씨를 총재에 대한 모욕죄라는 명분으로 ‘영구 제명’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한때 국민의 성원과 사랑에 힘입어 ‘유일한 한민족 전통스포츠’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씨름인 사이에 큰 벽이 생긴 것이다. ‘민속씨름의 부활’은, 이 갈라진 내부의 틈부터 메운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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