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은 변했어도 재즈의 방랑은 계속된다
  • 김현준 (재즈 비평가) ()
  • 승인 2008.09.0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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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본 한국 재즈/1978년 ‘야누스’ 클럽으로 시작해 ‘천년동안도’로 이어지며 마니아층 이끌어내
▲ 1978년 대학로에서 문을 열었던 재즈 클럽 ‘야누스’는 한국 재즈의 산파 역할을 했다. ⓒ시사저널 박은숙

1978년은 한국 재즈사가 특별한 해로 기록할 역사적 순간을 담고 있다. 당시의 주인공들은 그저 시공이 허락하는 대로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정확히 30년이 흐른 지금 이들은 소중한 역사가 되었다. 첫 번째 재즈 클럽 ‘야누스(Janus)’가 개업했고,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일련의 연주자들이 새로운 실험의 장을 열었으며,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레코드인 <째즈로 들어본 우리 가요·민요·팝송>(ANGEL- 0003)이 바로 이때 제작되었다. 그렇다고 1978년에 탄탄한 제반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재즈는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음악계 내에서 일정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당시의 모든 현상은 연주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최소한의 자구책이었다.

1978년 11월23일. 서울 대학로의 구석진 어느 골목에 ‘야누스’라는 간판이 걸렸고,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모인 음악인은 대부분 1960년대부터 미8군 무대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 재즈의 1세대로 불린다. 베이시스트 이판근, 트럼페터 강대관, 색소포니스트 이동기와 김수열 등이 주축이었으며, 당시만 해도 신예로 간주되던 피아니스트 신관웅과 색소포니스트 정성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야누스의 대표이자 한국 재즈의 대모인 보컬리스트 박성연이 무대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데, 당시의 야누스는 일종의 연주자 조합을 위한 사랑방과 같았다.

사실 개업한 시점으로 따져 최초의 기록은 이태원의 ‘올 댓 재즈(All That Jazz)’가 한 해 빠른 1977년이었다. 그러나 이 클럽이 우리나라 대중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는 전언을 감안하면 야누스를 본격적인 한국 재즈의 첫 무대로 인정해야 한다.

최초의 재즈 클럽은 이태원의 ‘올 댓 재즈’

현재 40대 중반 이상의 중진급 연주자들은 하나 빠짐없이 이곳에서 데뷔했고, 스윙과 모던재즈 등 정통성이 강한 스타일을 연주했다. 1세대 연주자들은 꾸준히 후배를 길러냈다. 그중에서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피아니스트 임인건과 이영경 등 좋은 연주자들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한국 재즈의 2세대를 형성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몇몇 젊은 연주자들은 유학의 길을 택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 김광민과 한충완, 정원영, 그리고 기타리스트 한상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연배는 2세대와 비슷하지만 퓨전 재즈를 지향한 음악성과 경력의 차이 때문에 3세대로 구분되고 있다. 어쨌든 야누스는 30여 년 간 한국 재즈의 산파 역할을 했고 연주자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했다. 여러 차례의 이전을 거쳐 현재 서울 서초동에서ㅅ영업 중인데, 아직도 이곳에 가면 또 다른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노래하는 박성연을 만날 수 있다.

야누스가 재즈의 보수적 가치를 중시했다면, 좀더 혁신적인 음악을 시도했던 몇몇 연주자들은 또 다른 무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때마침 문을 연 공간사랑보다 적합한 곳은 없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공간 사옥의 지하에 마련한 이 소극장은 사물놀이의 김덕수와 이광수, 그리고 무용가 공옥진의 이름을 알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1978년 이곳에 둥지를 튼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 전위적인 한국 프리재즈의 기초를 닦았다.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기이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재즈가 처음부터 다양성을 추구하며 건강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여러 연주자들이 야누스의 음악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이 실험의 대열에 함께했다. 그중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이들이 색소포니스트 강태환과 트럼페터 최선배, 그리고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이었다. 공간사랑은 연주자들의 분출하는 창작욕을 고스란히 떠안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릇이었다.

재즈는 대중음악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재즈라는 말이 통용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봇물이 터졌다. 1990년대 초반, 몇몇 매체와 드라마가 재즈를 하나의 문화 코드로 인식하면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 절대 다수는 거품에 불과했다. 야누스와 공간사랑에서 벌어진 치열함은 외면한 채 이미지만 판을 쳤다.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재즈는 ‘있어야 할 곳’에만 존재하는 음악 팬들의 전유물로 돌아갔다.

흔히 대중들이 지닌 가장 큰 오해가 재즈를 일반 대중음악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재즈가 태어난 미국에서도 팝 음악에 비해 재즈의 지분은 미미하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재즈는 불행을 자초하며, 대중의 눈치를 보는 순간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난제 속에서도 꾸준히 존속되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깊은 음악성 때문이다. 1990년대 말, 3년 간 유지되었던 대학로의 ‘딸기소극장’은 이런 특성을 대변한 또 하나의 공간사랑이었다.

한국 재즈의 연주자군(群)은 현재 30대가 주축인 4세대에 이르러 있다. 특히 이들의 노력이 대단한데, 적지 않은 수가 1990년대에 유학 생활을 거쳤으며 본토의 재즈를 충실히 학습한 뒤 참신한 현대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이들 덕에 한국 재즈는 어느새 외국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오늘날 재즈 연주자들을 가장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은 곳곳에 산재한 재즈 클럽이다. 그중에서 대학로의 ‘천년동안도’와 홍대 앞의 ‘에반스(Evans)’, 청담동의 ‘원스 인 어 블루문(Once in a Bluemoon)’을 특기할 만하다. 천년동안도는 비교적 다양한 스타일의 재즈가 연주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에반스는 마치 30년 전의 야누스가 그랬듯이 젊은 연주자들의 등용문으로 평가받는다. 원스 인 어 블루문은, 연주되는 음악의 폭은 좁으나 한결 안정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재즈를 즐길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닌다. 재즈가 그러하듯, 클럽의 지향에 정답은 있을 수 없다.

클럽 못지않게 재즈 팬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이 여러 공연장에서 벌어지는 라이브 무대다. 아직은 해외 유명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모으지만, 냉정히 말해 음악보다 이름값이 더 큰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 재즈가 어울리는 공간은 1천석 이상의 대규모 공연장이 아니다. 섬세한 소리가 절대적 가치를 좌우하는 재즈의 특성상 공간이 커질수록 연주자나 관객 모두에게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공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살피는 것 못지않게 어느 무대에서 연주가 펼쳐지는가를 따질 필요가 있다. 매년 같은 장소에서 며칠짜리 프로그램으로 기획되는 대규모 페스티벌도 있다. 경기도 가평에서 열리는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 대표적이다. 물론 야외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의 무대와 객석이 음악을 듣기에 최적의 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여러 가지 스타일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음악인과 재즈 팬들의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야누스와 공간사랑의 비좁은 무대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야외 무대까지, 30년의 힘은 컸다. 그러나 재즈는 ‘찾아 듣는’ 이들의 음악이다. 연주자도 마찬가지다. 객석의 사람들은 변했지만 재즈는 언제나 새로운 무대를 찾아 방랑의 길을 걸어왔다. 떠돌지 않는다면, 한 곳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재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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