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도 ‘강남’을 좋아해
  • 김세원 편집위원 ()
  • 승인 2008.09.09 15: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시장, 인사동에서 청담동으로 중심 이동 … 유명 화랑ᆞ경매 회사들 속속 둥지 틀어
▲ 지난 4월 강남에 문을 연 PKM 트리니티 갤러리의 내부.

지난 9월3일 오후 6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성수대교 남단 LG패션 뒤편의 신축 빌딩 앞에 고급 세단들이 멈춰서 있다. 입구에는 화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성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갤러리 현대 강남의 개관식이 시작된 것이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네 개 층으로 구성된 전시장 면적만 1천5백㎡(4백50평)이고 사무실로 쓰이는 4, 5층과 지하2, 3층의 주차장까지 포함하면 총 4천5백85㎡(1천3백86평) 규모의 초대형 미술관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목으로 추상미술 1세대인 김환기씨(1913~1974)와 유영국씨(1916~2002)의 전성기 작품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2층에는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씨(1932~2006)의 설치 작품 속 TV 모니터와 극사실적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씨(1929~)의 그림 속 물방울이 반짝인다. 이어지는 방에는 1970년대 일본에서 활동하며 단색조 회화를 개척한 이우환·정상화, 서른다섯에 요절한 문승근씨의 그림이 삼중주로 어우러진다.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지상의 밖에서 안이 환히들여다보이는 지하 1층에서는 미국 뉴멕시코 주 산타페를 배경으로 한 오치균씨의 <산타페>전이 열리고 있다. 미술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워낙 유명하고 비싼 작품들이어서 화랑가에서는 현대의 명성이 아니고는 한 곳에 모아 전시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떠돈다. 개인 소장가들이 이유 중인 작품이 절반 이상이라 한데 모으기 위해 거액의 보험료를 지불했다는 후문이다.

경매회사들, 강남 고객 잡기 경쟁

1970년 서울 인사동에 현대 화랑을 열고1975년부터 사간동에 둥지를 튼 이래, 한국 상업 화랑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한 갤러리 현대의 강남 진출은 지난해 미술시장 호황 붐을 타고 본격화된 화랑들의 ‘강남 이주랠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서울 강남에 층당 100평이 넘는 복층 전시장을 낸 것은 지난 4월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 이어 갤러리 현대가 두 번째다. 강북 화동(북촌)의 PKM갤러리는 2006년 11월 중국 베이징 차오창디에 두 번째 화랑을 낸 데 이어 지난 4월 청담동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 트리니티플레이스 지하 2, 3층에 5백㎡(180평) 규모의 대형 갤러리를 만들었다. 제일모직이 이탈리아 밀라노의 복합문화공간 운영회사와 제휴해 만든 의류 액세서리 음반 매장과 책방, 아트숍, 카페의 멀티 편집매장 ‘10꼬르소 코모’가 1층에 입점해 있고, 위층에는 프라이비트 뱅크가 있어 강남권 부유층 컬렉터들을 잡기에 안성맞춤이다. 이곳에서는 9월3일부터 사진작가 김상길씨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8월 말 강남 도산공원 맞은편 엠포리아 빌딩에 문을 연 신생 경매회사 D옥션은 서울옥션과 K옥션이 양분하고 있는 미술품 경매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9월4일 개최한 첫 경매에서 D옥션은 샤갈의 <오렌지색 조끼를 입은 화가>, 로댕의 조각 <입맞춤> 등 해외 거장들의작품을 포함한 2백여 점을 선보여 1백30여 억원의 거래 규모에 97.6%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1주일 뒤인 9월12~16일 서울옥션도 여기에 뒤질세라 삼성동 코엑스에서 <아트 옥션쇼 인 서울>을 개최했다. 앤디 워홀, 웨민쥔, 리히터 등세계적인 블루칩 작가를 포함해 3백여 작가의 작품 1천3백여 점이 선보인 초대형 경매 행사였다. 사간동의 K옥션도 지난해 청담동에 신사옥을 설립하면서 9월18, 19일 국내 작품 2백여점과 해외 작품 1백50점 등 출품작만 4백76점에 이르는 대규모 경매를 개최했다. 여기에 청담동 화랑가의 터줏대감 격인 박여숙·박영덕 갤러리가 주축이 되어 ‘아트펀드 한국미술투자’를 설립하면서 강남 청담동 일대가 미술시장의 메카로 급부상하고 있다.

▲ 지난 9월3일 개관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강남 시대’를 연 갤러리 현대.

외국 유명 화랑들도 잇달아 상륙

이렇게 강남에 새로 개관하거나 이전하는 갤러리와 미술품 경매회사들이 늘어나면서 미술시장이 인사동에서 청담동으로 중심 이동 중이다. 50대 이상의 전통 부자 위주였던 미술품고객층이 넓어지고 30~40대로 젊어진 데다신규 컬렉터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이같은 트렌드는 2004년부터 시작된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잇단 대형 기획전의 영향으로 미술과는 거리가 멀었던 중산층들이 미술에 관심을 갖게된 것과 관련이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출발해 사간동, 소격동, 삼청동을 거쳐 평창동으로 확장된 강북의 ‘아트 벨트’가 지난해 미술시장 호황 붐을 타고 강남권 ‘아트 밸리’로 진화해가고 있다. 강남 화랑 시대의 출발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1978년 인사동에 설립된 예화랑이 1982년 강남구 신사동으로 이전한 것이 시작이다. 이듬해인 1983년, 박여숙화랑이 갤러리 불모지였던 청담동에 터를 마련했다.

1993년에는 박여숙씨와 함께 강남의 ‘투 박(two Park)’으로 불리는 박영덕씨가 청담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화랑을 열었다가 지난해 12월 네이처포엠빌딩 3층에 4백㎡(약 1백20평)의 넓은 전시 공간을 확보해 이전했다. 박씨는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청담 사거리 명품 매장들 사이에 위치한 네이처포엠빌딩은 강남 ‘아트 밸리’의 랜드마크다.한국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메이저 화랑들이 분점을 내거나 외국의 유수 화랑이 지점을 새로 내면서 건물 자체가 ‘갤러리 백화점’으로 변신했다. 지난 2005년 봄 갤러리 미가 처음 입점한 뒤, 현재 14개의 크고 작은 화랑들이 밀집해 있다. 1층에는 오페라 갤러리와 조현화랑, 2층에는 독일계 마이클 슐츠 서울점, 갤러리 눈, 이화익 갤러리, 3층에는 금빛 갤러리, 박여숙 화랑, 갤러리2, 갤러리 미, 윌슨 컴퍼니, 지하에는 표 갤러리 사우스 등이 있다.

쇼윈도우를 포함해 3백30㎡(100평)의 전시공간을 자랑하는 오페라 갤러리의 본사는 프랑스로 세계 8개 도시에 지점을 두고 있다. 독일 3개 화랑 가운데 하나로 베를린에 본사를 둔 마이클슐츠 갤러리 한국지점도 2006년 말둥지를 틀었다. 아트2021 갤러리는 화랑 강남 진출 1호를 기록한 예화랑의 분점으로 이숙영 대표의 딸인 김방은 실장이 운영을 맡고 있다.

이밖에 이화익 갤러리, 표갤러리, 조현화랑은 강북이나 부산 등에 본점을 둔 채 이곳에 지점을 냈다. 특히 박여숙(한나라당 박진 의원의 사촌누나)·이화익(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부인)·조현(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의 부인)씨 등 여권 실세의 가족 세 사람이 한 건물에 화랑을 냈다고 해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박여숙화랑, 박영덕화랑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아트펀드 한국미술투자의 전시장인 갤러리C도 이 건물 내에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