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북한 핵보다 ‘김정일 변수’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08.09.2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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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발생할 경우 한반도에 어떤 변화 일어날까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군부대를 방문해 식량 창고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공식 활동이 한 달여 동안 보이지 않고 외부로부터 의사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정보가 나오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을 맞는 ‘9·9절’ 행사에 김위원장이 나오지 않자 김정일 중병설은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분위기이다.

김위원장의 병세는 외모에서 나타난 여러 병인 이외에도 미국과 핵 담판을 벌이는 과정에서 생긴 과부하가 원인인지도 모른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한 김일성의 경우처럼 미국과 핵협상을 하면서 김정일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 막바지에 이르러 지금까지 협상을 결산하는 중요한 담판을 벌이고 있다. 지난 8월26일 북한은 핵불능화 유보 카드를 내밀었고, 미국은 다소 완화된 검증 절차를 제안해놓은 상태이다.

북한은 지금 20여 년 동안 끌어온 핵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하고 미국의 다음 정부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핵협상을 다시 하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즉 북한은 불능화 조치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교환해 경제 재건을 본격화하느냐, 아니면 주변 국가와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지속하느냐의 갈림길 앞에 있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핵문제의 가닥을 잡고 경제를 재건해야 후계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김정일 후계 체제 구축에 큰 무리는 없어 보여

김위원장의 건강 변수가 현안으로 떠올라 있지만, 북·미 간에는 뉴욕 채널을 통해 접촉을 지속하면서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마지막 중간 결산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이 김위원장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는 점도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적어도 북핵 불능화를 완수하고 3단계 핵폐기 협상을 다음 정부로 넘기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11월 대선 전에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을 해제하느냐아니면 대선 이후에 하느냐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이 김정일 정권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김위원장은 중대 결단을 위한 장고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김위원장으로서는 정권 수립 60주년 행사도 중요하지만 북·미 핵 담판이 더 중요한 현안이다. 당-국가체제를 운영하는 북한에서는 정권 수립 기념일보다는 당 창건 기념일이 더 비중 있는 날이라는 점에서 김위원장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지난 시기에도 김정일은 정세가 긴장되거나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장기간 칩거한 전례가 있다.

9월17일자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9·9절 기념 열병식에 김정일 위원장이 불참한 데 따른 건강 이상설에 대해 “과거에도 조·미(북·미) 대결이 격화되고 조선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최고 영도자의 활동이 일정한 기간 언론을 통해 공개되지 않은 때가 있었다”라며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북한은 외부 세계의 건강 악화설에 맞서 ‘정세 긴장에 따른 칩거설’을 내놓고 당분간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관망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도자 중심의 유일 체제이기 때문에 건강 이상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중대 사태’임이 분명하다. 김위원장이 통치할 정도의 건강을 유지한다면 선군정치를 강화하면서 후계를 서두를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 기본 통치 방식으로 선군정치를 내세워왔다. 이에 따라 과대 성장한 군이 체제 수호의 보루이자 경제 건설의 주력으로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왔다. 김위원장은 건강 악화에 따른 통치력 약화를 막기 위해서 선군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후계 체제 구축을 서두를 것이다. 지금까지 준비해온 3, 4세대 엘리트 그룹의 중심에 선정된 후계자를 앉혀 후계 체제를 본격적으로 작동시키는 형태로 후계를 정비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에 의한 후계 체제 구축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후계 체제 구축 과정에서 확립한 ‘후계자론’에 따라 아들들에게 후계 수업을 받게 한 후 그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위로부터 후계 체제를 정비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후계자론과 만경대·백두산 혁명가계론에 따르면 김형직-김일성-김정일-김정일 아들(김정남·김정철·김정운)로 이어지는 후계 구도를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한다. 그동안 북한은 수령의 혁명 위업의 계승 발전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김일성의 혁명 전통을 대를 이어 완성하는 ‘혁명계승론’과 ‘혈통계승론’에 따라 김정일의 아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지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김위원장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경우, 유고와 동시에 북한이 붕괴되거나 혼란에 빠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동독과 사회주의권의 체제 전환 과정을 지켜본 북한이 붕괴를 피해갈 ‘부정적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유고가 발생할 경우 우선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 등 친인척을 중심으로 한 과도적 리더십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다음 지도자로는 김정남, 김정운 같은 애들이 아니라, 김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이 유력하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2003년 7월 황장엽은 당시 기준으로 “장성택의 큰형(장성우 차수 70세)이 수도 방위도 맡는 3군단장이고, 작은형(장성길 중장 66세)도 군단장급인 데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조직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지금 사실상 북한의 제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런 유고가 생길 경우 북한에서 선군정치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국방위원회가 우리의 비상계엄 체제 운영과 비슷한 형태로 전면에 나서 치안 유지 등 위기 관리 체제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새로운 지도부를 옹립할 때까지 군부 집단지도 체제를 운영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야심가가 나타날 경우 북한 내부의 급격한 권력 변동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대비책 수립 시급

김위원장의 건강 문제가 불거짐으로써 한반도 문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전환기로 접어들었다. 북·미 간 북핵 협상의 진전 여부는 불투명해졌고, 북한 급변 사태시 핵무기와 핵물질의 안정적 관리 문제가 새로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남북 관계에서도 남북 관계 원상 회복보다는 김정일 변수에 따라 예상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처가 더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했다. 김위원장의 건강 문제가 미래의 문제가 아닌 현실의 문제로 떠올랐으므로 우리로서는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대비책을 서둘러 정비해야 한다. 남북 화해 협력도 중요하지만 북한 위기 관리가 더 중요한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위기 관리 체제에서 북한은 남한에 대한 경계심을 높일 수밖에 없고, 남쪽 역시도 비상 대비 계획들을 염두에 두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 남북 관계는 긴장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 이외에 남북 관계를 급진전시킬 묘안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핵문제보다 김정일 변수가 한반도의 더 중요한 지정학적 리스크로 떠올랐다. 북한 변수가 한국 경제 살리기의 악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노련한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김일성 사후 남측의 ‘과도한’ 위기 대응을 문제 삼아 남북 관계 경색이 장기화했던 것을 교훈으로,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위기 대응 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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