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권력’ 업은 타고난 거물
  • 일본·임수택 편집위원 ()
  • 승인 2008.09.3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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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가문, “일본 근대사 쓸 정도” 명문 중 명문

▲ 아소 다로 일본 외무장관(위 왼쪽)이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그의 부인 시카코 씨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최근 일본의 총리는 세습 정치인 일색이다. 현 아소 총리를 비롯해 전임 후쿠다·아베·고이즈미 총리 등 연속해서 네 명의 총리가 대표적인 세습 정치인들이다. 이번 아소 내각의 장관 중에도 세습 정치인들이 많다. 나카소네 히로후미 외무장관은 바로 나카소네 전 총리의 아들이며, 34세 최연소로 소자화 담당 장관으로 입각한 오부치 유코 의원은 돌아간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딸이다. 이번 내각에서 하도야마 쿠니오 총무성 장관을 비롯해 18명 중 11명이 세습 정치인이다.

이러한 세습 정치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아소 총리의 정치 가문이다. 아소 총리는 1940년생(68세)이다. 일본 남부 큐슈의 탄광왕으로 알려진 아소 타가요시 씨의 장남으로 명문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중의원 3선을 했다. 고조 할아버지가 메이지 정부의 내무경을 지낸 오오쿠보 도시미치 씨이다. 외할아버지는 요시다 시게루 씨이며, 여동생 아소 노부코 씨는 현 아키히토 일왕의 친조카인 도모히토 씨의 부인이다. 부인은 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딸이다. 타니가키 전 국토교통상은 “국회의원들 중에 유명한 가문이 많이 있지만 아소 총리 집안은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라고 말했다. 아소 가계만을 가지고도 일본의 근대사를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정치적 유산 속에서 성장한 아소 총리의 정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보수·우익이 되었다. 아소 총리의 정치적 유전자는 바로 패전 후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총리로 재임하면서 일본 부흥에 기여한 외조부인 요시다 시게루 씨에서 비롯되었다. 요시다 시게루 씨가 강조한 “일본인의 에너지는 대단하다. 일본인에게는 저력이 있다”라는 말을 아소 총리는 강하게 의식하면서 자라왔다. 이런 영향 속에 지난해 <대단한 일본>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일본의 저력’을 캐치플레이로 내걸었다.

이러한 국수주의적인 생각은 주변 국가와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데서 시작되었다” “쇼토쿠 시대부터 일본과 중국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나쁜 것이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뿐이다”라는 망언으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외무장관이 된 이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등 우호 관계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헌법 개정과 집단적 자위권을 주장하고 있어 마찰의 불씨는 남아 있다.

‘창씨개명 망언’ 등 튀는 발언으로 종종 화제 올라

아소 총리는 세 살 때 고향인 후쿠오카 이즈카를 떠나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귀족학교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이후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원과 영국 런던 대학원에 유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스포츠에 심취해 15세 때 사격을 시작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클레이 사격 선수로 출전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한 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권유로 입문하게 된 골프 실력은 싱글 수준이다.

▲ 가운데는 아소 총리의 외조부 요시다 시게루 씨. ⓒAP연합
팝 음악, 패션 등 젊은이 문화에도 관심이 많으며 일본의 소프트파워가 일본의 저력이라고 강조한다. 아소 총리는 대단한 만화광이다. 매주10권 이상의 만화책을 독파하고 차 안에 만화를 가득 싣고 다닌다. 외무장관 시절에는 국제만화상을 창설해 일본 만화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2006년 총재 선거 때는 도쿄 아키하바라 연설에서 “오타쿠(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신 여러분”이라고 연설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25세에 경영에 참가해 32세 되던 해에 가업인 아소 시멘트 사장이 되었다.

본격적인 정치 생활은 1979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외무장관, 총무장관, 당 정조회장, 간사장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화려한 정치 생활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이케다 하야토, 오오히라 마사요시 양대 총리를 배출한 파벌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가토 준이치 전 간사장 등 주류파와의 불화로 17년이 지나서야 겨우 첫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파벌을 이탈해 10여 명의 소수 세력으로 오랜 세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소 총리의 브랜드(?) 중 하나는 톡톡 튀는 발언이다. 절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실언을 많이 해 종종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올 8월 국회에서 에다사쓰기 참의원 의장 등에게 민주당을 나치에 비교하며 “역사를 뒤돌아보면 여당에서 민심이 이반한 결과 나치와 같은 정권이 들어선 예가 있다”라고 말해 민주당의 분노를 샀다. 지난해 7월 참의원 지원 연설 때는 중국과 일본의 쌀 가격 차에 대해 “어느 쪽이 높은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이라도 안다”라는 튀는 발언으로 주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일본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길을 걸어온 아소 총리가 서민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한 아베·후쿠다 두 정권에 걸쳐 간사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총재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두 정권 다 중도하차하게 했다고 비난하는 소리도 있다. 4수를 한 낙천적인 아소 총리가 총선거를 비롯한 산적한 현안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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