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지원국 해제’ 줄다리기 언제까지
  • 고유환 (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08.10.0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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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시설 불능화 조치 중단한다며 압박… 미국은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성과 바라며 ‘눈치’ 보기
▲ 미국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10월3일 김숙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의 회동을 마치고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북한은 지난 8월26일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지연을 문제 삼아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 복구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핵 문제가 또다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이 종료되자마자 북한은 전통적 협상전술인 ‘벼랑 끝 전술’에 따라 위기 조성을 통해 국면을 전환해보자는 의도를 노출했다. 북한의 메시지는 미국이 동시 행동 원칙에 따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라는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와병설로 북핵 문제가 잠시 우리의 관심밖에 있었지만, 핵시설에 대한 원상 복구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미국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북핵 구조는 충격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북한은 2006년 10월9일 북핵 실험이라는 충격요법을 통해서 국면을 전환하고, 2007년 6자회담의 2·13 합의를 통해서 폐쇄→불능화→폐기로 이어지는 3단계 북핵 해법을 마련했다. 10·3합의에서는 북한이 2007년 12월31일까지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를 마무리하면, 그 대가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절차에 착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까지 완료하기로 한 2단계 불능화 조치가 신고 및 검증 문제와 관련한 북·미 갈등으로 늦어지고 있다.

“핵 신고서 제출했는데 왜 삭제하지 않나”

북한은 지난 6월26일 핵 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단정하고,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을 삭제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합의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9·19 공동성명 등에서 합의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의 표시로 위기 조성 전술 차원에서 대미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북한은 핵 신고서 제출 직후인 6월27일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했다. 3단계 핵폐기 단계에서 해도 될 냉각탑 폭파를 서둘러 한 것은 불능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해 미국 강경파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국제 사회에 불능화 의지를 확인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냉각탑 폭파를 시행할 때만 해도 테러지원국 해제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미국과 북한은 지난해 10·3 합의에 따라 북한이 완전하고 정확한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고, 영변 핵시설을 불능화하면 미국은 그에 대한 대가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키로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 신고서를 제출한 다음 날 미국 의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할 방침임을 통보했다. 45일간의 의회 통보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6자회담 당사국들이 모두 만족하고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핵 검증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며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는 것을 유보하고 있다.

미국은 ‘신고와 검증은 한 패키지’라고 하면서 플루토늄뿐만 아니라 북한과 시리아의 핵 협력, 우라늄 농축 의혹 등도 포괄적으로 핵 검증 체계에 담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검증 방법에서도 ‘특별 사찰’에 준하는 샘플 채취와 불시 방문,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 허용 등을 요구했다. 북한과 미국은 뉴욕 채널을 통해서 북핵 프로그램 검증 체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협의에 나섰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북한은 8월26일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9월2일 미국측에 핵시설 복구 작업 개시 결정을 통보했다. 9월19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조치의 효력 발생을 무기한 연기한 데 대응해 핵시설 무력화 작업을 중단했으며 얼마 전부터 영변 핵시설들을 원상 복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9월24일에는 핵시설 봉인 및 감시 카메라 제거,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 현장 접근 통제 등의 조치를 취했다.

북한이 단계별로 위기 조성의 수위를 높이자 급기야 크리스토퍼 힐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10월2일 평양으로 들어갔다. 힐 차관보는 북핵 6자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핵 검증 체계 구축과 관련해 북한에 새로운 제안을 가지고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이 10월1일 밝혔다. 그는 힐 차관보가 새로운 제안도 없으면서 굳이 방북을 강행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북한이 초청을 했고, 힐 차관보는 초청을 수락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또, 매코맥 대변인은 “힐 차관보가 북한에 직접 가서 사태 진전이 가능할지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비행기 삯이 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북한의 상대와) 머리를 맞대고 검증 체계 문제와 관련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일을 시간 낭비라고 보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부시 행정부 임기를 고려할 때 미국은 북핵 상황이 다시 악화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불능화가 무산되고 6자회담의 판이 깨지면 부시 행정부의 북핵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힐 차관보 방북은 시간 낭비 아니다”

북한이 위기 조성의 수위를 높이는 것은 판을 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겨냥한 대미 압박용으로 볼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 해결 2단계인 불능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외교적 실패에 따른 여론의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은 부시 행정부를 압박해서 테러지원국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1차적 목적을 두고 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한 법적 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이 결단하면 명단 해제는 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은 부시 행정부를 압박해 테러지원국 명단을 삭제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 당장 판을 깨자는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으면 북한은 핵보유국의 지위를 누리면서 미국의 다음 정부와 협상하려 들지도 모른다. 북한은 최악의 경우 판을 깨더라도 핵보유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핵무기를 억제력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불능화 중단카드를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대해 핵보유 인정이냐, 테러지원국 해제냐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 막바지에 이르러 지금까지 협상을 결산하는 중요한 담판을 벌이고 있다. 지난 8월26일 북한은 불능화 유보와 원상 복구 카드를 내밀었고, 미국은 다소 완화된 검증방식과 절차를 제안해 놓은 상태이다. 북한은 지금 20여 년 동안 끌어온 핵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하고 미국의 다음 정부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북핵 협상을 다시 하느냐의 중대 기로에 서 있다. 또 불능화 조치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교환해 경제 재건을 본격화하느냐, 아니면 주변국가와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지속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핵문제의 가닥을 잡고 경제를 재건해야 후계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김위원장의 건강 변수가 현안으로 떠올라 있지만, 북·미 간에는 접촉과 대화를 지속하면서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마지막 중간결산을 시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미국이 김위원장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는 점도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적어도 북핵 불능화를 완수하고 3단계 핵폐기 협상을 다음 정부로 넘기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11월 대선 전에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을 해제하느냐 아니면 대선 이후에 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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