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천하’ 이스라엘 중동 평화 숨통 틔울까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10.0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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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피 리브니 장관, 이스라엘 역대 두 번째 여성 총리 될 듯 입법ᆞ사법ᆞ행정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는 초유 상황 앞둬

▲ 9월17일 집권 여당의 당수로 선출된 치피리브니 이스라엘 외무장관이 지지자들의 모임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EPA

이스라엘 외무장관인 치피 리브니가 9월17일 집권 여당의 당수로 선출됨으로써 두 번째 여성 총리 탄생의 길이 열렸다. 그가 연정 구성을 통해 총리가 되면 이스라엘은 세계 최초로 행정·사법·입법부 3부 수장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는 초유의 상황을 맞는다. 이제 세상의 관심은 이스라엘이 여성들의 지배 하에 들어감으로써 남성 지도자들의 강경 노선 때문에 성사되지 못한 중동 평화에  서광이 비칠 것인가에 쏠리고 있다.

리브니가 총리가 될 공산은 이변이 없는 한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그녀가 총리가 될 경우 팔레스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 지도자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도자들을 호칭할 때 성 대신 이름을 부르거나 별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리브니는 다르다. 그녀는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다. 그녀의 다부진 성격이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서 잠시 근무한 경력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그녀는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른 비정형의 냄새를 풍긴다. 바로 이 점이 결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오늘의 이스라엘에 필요한 지도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준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집권 카미다 당의 당수 선거에서 경쟁자에 겨우 1% 차이로 신승했다.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어도 모자랄 판에 가까스로 승리한 그가 연정을 구성하고 중동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그녀의 전임자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는 부패 혐의로 물러나게 되어 있다. 그녀가 총리가 될 경우 그녀를 둘러싼 정치 환경이 결코, 녹녹치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좁은 시각과는 달리 그녀의 지지도는 의외로 높다. 이스라엘 국민은 계파와 지역을 초월해 거의 전폭적으로 그녀가 이스라엘을 이끌기를 바란다. 이렇게 거국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그가 올메르트의 연정을 재건해 총리가 된다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극단주의와 증오로 얼룩진 이스라엘 정치사에서 ‘중도’(middle)를 표방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중도는 공교롭게도 중동(中東)을 뜻하는 ‘Middle’과도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미 ‘중도 이스라엘(MIddle Israel)’의 구원투수로 불릴 정도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온건과 합리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모사드 근무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군사 문화가 지배하는 이스라엘 풍토에서 줄기차게 민간인의 길을 걸어왔다. 이런 합리적 성향을 감안하면 그녀가 이스라엘을 전쟁보다는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녀는 중도를 선호하는 많은 이스라엘 국민을 대표한다. 이스라엘이 살 길은 중도와 민주주의밖에 없다는 역사학자들의 끈질긴 주장이 그녀를 통해 실현될 기회가 온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세계와 끝없이 대결 정책을 펴온 호전파와 군인들을 병영 안에 가두고 이스라엘을 둘러싼 모든 나라와 평화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적임자로서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외형상의 강경 노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치의 핵심은 이웃 국가들과의 공존이다. 무슬림과 유대인이 사이 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리브니 자신은 물론, 최대 야당인 리쿠르트당 쪽에서도 이에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리브니는 이 정치 지형을 정확하게 읽고 있다. 그래서 ‘거대한 이스라엘’의 꿈도 포기했다. 중동 분쟁의 현실적 해결책으로 2개 국가 아이디어를 선택했다. 즉,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국가로 상생하자는 것이다. 총리로서의 그녀의 최우선 과제는 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의향과 개연성도 높아 일석이조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중도’ 표방하며 팔레스타인과 완전한 평화 전제한 실용적 거래 추구


리브니의 또 다른 장점은 깨끗하다는 것이다. 숱한 지도자들이 부패에 연루되었으나 그녀는 비리 스캔들에 휩싸인 적이 없다. 성장 배경과 법무장관 경력만 보아도 청렴을 신조로 삼는 그녀의 결벽을 알 수 있다. 전임 4명의 총리 누구와 비교해도 그녀는 청렴 외에도 소박과 겸손까지 갖추었다. 그녀가 팔레스타인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외교에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그녀의 절제와 자제력에 주목한다. 그녀 역시 외무장관으로서 아랍권의 평화 제의를 액면대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협상문은 계속 열어놓았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아바스와도 그랬다. 그의 외교는 현란하지 않다. 말투는 무디고 감동적이지도 않다. 영어에도 능통하지 못하다. 그러나 능숙한 언변을 지녀야만 외교를 잘 한다는 법은 없다.

▲ 대통령 권한 대행 중인 달리아 이치크 국회의장. ⓒEPA

좌편향의 변증 논리와는 거리가 먼 그녀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당연한 것으로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과의 실용적 거래를 존중한다. 단, 완전한 평화를 전제로 한다.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반대 급부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영토가 성지는 아니다. 사람이 사는 장소 정도의 의미이다. 이 철학은, 합리성은 미진할지 모르나 기회의 지평선을 연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아니다. 몇 주 후 그가 총리가 되면 이스라엘은 ‘여인 천하’가 된다. 크네세트(국회) 의장도 여성, 대법원장도 여성이다. 군인과 험악한 보스들이 군림해온 나라에서 혁명적인 현상이다.

중도 이스라엘 이상이 리브니 모델을 탄생시킨 것은 좋은 뉴스이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만약 연정 구성에 실패한다면 총선을 해야 하고 종교적 우파 연정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야당은 이미 총선을 하자고 요구한다. 자칫하면 그녀도 전임자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정치 역정으로 미루어 기회가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리브니의 등장에 대한 아랍권의 반응은 기대 반, 회의 반이다. 리브니의 합리적 성격에 기대를 걸기도 하지만 그녀가 종국에는 올메르트의 고집스런 노선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청렴성으로 무장한 그녀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무기로 중동 평화를 밀어붙인다면 반드시 유익한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다수 아랍 국가에서 나타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5월16일 건국 60주년을 맞았다. 이스라엘 건국일은 팔레스타인에게는 망국의 날이다. 두 민족은 60년을 적대해왔다. 그 정도면 지칠 때도 되었다. 해결은 간단해 보인다. 팔레스타인이 독립 국가로 자유를 누리는 대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교환 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희미하나마 바로 이 가능성에 서광을 주는 사람이 리브니이다. 그녀가 60년의 증오를 화해와 평화로 바꾼다면 중동 역사는 다시 써야 한다. 마침 사임을 발표하고 과도기 총리직을 맡고 있는 올메르트도 모든 점령지에서 이스라엘군의 철군을 촉구했다. 리브니의 평화 제스처에 힘을 실어주는 조짐이다.

이스라엘도 배부른 흥정만 할 때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대부 미국은 대공항보다 지독한 금융 위기를 겪고 있고 이란 미사일은 예루살렘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 땅에 미사일 방어망까지 설치했다. 시간이 없다. 팔레스타인도 화해를 손짓하고 있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포착하는 일은 전적으로  리브니의 손에 달려 있다. 그녀에게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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