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 지우고 ‘수다’의 볼륨 다시 높이다
  • 하재근 (문화평론가) ()
  • 승인 2008.10.1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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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들의 수다>, 최근 정체성 되찾아 ‘의미’와 ‘재미’ 아우르려 노력…한국 사회 치부 둘러싼 토

▲ 글로벌 토크쇼를 표방한 (위)는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여성들을 출연시켜 그들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을 자유롭게 말하게 해 인기를 끌고 있다. ⓒKBS 제공

KBS<미녀들의 수다>는 ‘외국인 여성들이 본 한국의 문화, 한국의 남자, 한국의 현주소를 다룬 글로벌 토크’쇼를 표방한다. 또, 한국인이 외국인 여성들을 통해 각국의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도 취지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동안 <미녀들의 수다>는 이런 취지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외국인 여성들을 외모 중심으로 데려다 앉혀놓고 신변 잡기나 늘어놓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진솔한 대화의 장이 아닌 외국인들의 연예인 진출을 위한 쇼라는 비판도 많았는데, 그런 비난은 자밀라가 출연했을 때 절정에 달했었다.

자밀라의 출연은 ‘자밀라 파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터넷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밀라의 별명은 ‘애교 밀라’, ‘교태 밀라’였었다. 정작 자밀라는 한국말로 수다를 떨 능력도, 의사도 없어 보였었다. 그런 자밀라에게 프로그램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애교’ ‘교태’가 ‘수다’를 밀어내고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 형국이었다. 이것은 <미녀들의 수다>의 정체성이 상업성으로 무너진 상징처럼 받아들여졌고, 네티즌 사이에서는 프로그램 폐지 주장까지 나왔었다.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예쁜 여자를 앉혀놓고 미모만을 즐기는 포맷이라면 케이블 TV에서 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때 쏟아졌던 비난들이 <미녀들의 수다>에는 약이 되었던 것 같다. 요즘 <미녀들의 수다>는 ‘의미’와 ‘재미’를 아우르려 노력하는 듯이 보인다. 진행자인 남희석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은 사안일 때는 시청자들에게 정중히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인종별·국가별로 출연자들의 발언 기회를 골고루 배려하려 노력하는 것도 눈에 띈다.

현재의 <미녀들의 수다>는 공중파 예능 오락물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월요일 밤에 <미녀들의 수다>와 함께 경쟁하고 있는 유재석의
<놀러와>, 강호동의 <야심만만2-예능 선수촌>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버거운 경쟁 프로와 차별화에도 성공

<놀러와> <예능선수촌>의 내용은 신변 잡기 그 자체이다. <놀러와>는 연예인들이 평소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테마이다. <예능선수촌>에서는 연예인들이 경쟁적으로 사생활을 드러내는 ‘올킬’이라는 테마가 중요하다. 연예인들의 화려한 모습과 감춰진 사생활은 예능의 재미로서는 최고의 주제 중 하나이다. 100억원이 투입된 영화도 한 시간 보기가 지루한 경우가 다반사인데, 연예인 사생활을 듣다 보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더군다나 이 두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현재 예능계의 투톱인 유재석과 강호동이다. 의미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 이 두 작품과 경쟁하는 것은 버거워 보인다.

그러나 <미녀들의 수다>는 <놀러와> <예능선수촌>에 조금도 뒤지지 않고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프로그램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주중 토크쇼 포맷의 예능과 주말 리얼 버라이어티 포맷의 예능을 통틀어 <미녀들의 수다>가 가장 유의미한 재미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9월 마지막 방영분은 이 프로그램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준 한 회였다. 이때의 주제는 ‘한국에서 ‘○○○ 하면 무시당한다’였다. 프랑스에서 온 아나이스는 서울 압구정동에서 경차를 주차하면 무시당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자신이 경차를 타고 압구정동 레스토랑에 갔는데 업소 앞 주차를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온 비앙카도 경차를 가지고 가면 차별받는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다음 날 화제가 되었다. 거기에 대한 반론으로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프로그램 중에서 독일인인 베라가 독일에서도 BMW 운전자가 작은 차 운전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 것이 그 근거였다. 그러면서 <미녀들의 수다>가 한국을 지나치게 비하한다고 비난하는 네티즌들이 있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부자가 일반 서민을 무시하는 경향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도이다. 서북부 유럽에 비해 후진적 사회는 이런 경향이 너무 강하고 노골적이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자기 아버지의 직업을 자꾸 물어서 놀랐다고 했다. 흑인 출연자가 자기 아버지가 판사라고 하자 한국인 방청객들은 모두 소리를 내며 경탄했다. 이렇게 그 집안의 재산, 사회적 지위에 민감하다는 것은 가난하고, 열등한 것을 무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국인에게는 모든 개인이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는 생각보다, 지위에 따라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관념이 강한 것이다.

외국인 시각 빌려 한국 사회 객관적 조명

그 지위와 재산을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동차의 가격과 크기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이런 것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온 출연자는 자기들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경차를 많이 타고 다닌다고 했다. 경차 보급률은 일본 32%, 프랑스 39%, 한국 4%이다.

이날 <미녀들의 수다>에서는 한국 사회의 치부가 연이어 폭로되었다. 영어를 섞어 쓰지 않으면 무시당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일본인 출연자에게 ‘핫도그’ 발음을 시키자 그녀는 ‘호또도꾸’라고 했다. 일본은 산업 경쟁력이 독일과 함께 세계 최고인 나라이다. 그렇지만 국민은 ‘핫도그’를 ‘호또도꾸’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우린 ‘오렌지’를 ‘어린지’라고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한 사회 분위기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강박적으로 추종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차를 무시하고 큰 차에 주눅 드는 풍토와 같은 맥락이다.

<미녀들의 수다>에서는 미국식 영어, 미국식 발음만을 최고로 치는 한국 사회의 문제도 종종 지적된다. 한 번 영어 발음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각국의 출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인의 영어 발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한국인은 이런 정도의 주체적인 의식을 갖지 못한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했을 때도 그것이 미국식 발음이 아니어서 창피하다는 댓글이 인터넷에 가득했었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단일 민족’이라는 이상한 신화를 가지고 있는 폐쇄적인 사회이다. 세계에서 화교가 버티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말을 듣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개방성은 오로지 미국을 향해서만 열려 있는 듯이 보인다.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폐쇄적인 구조에서는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기가 힘들다. 자기가 자기를 타자화해서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히 ‘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미녀들의 수다>가 하는 역할은 한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낯설게 보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것을 보며 한국인은 외국인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의 타자인 외국인의 시각을 빌어 한국 문화를 타자화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한국인에게는 소중한 체험이다. <미녀들의 수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흑인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도 했다. 이런 주제는 교양 프로그램에 흔한 것이지만, 인기 있는 예능에서 재미와 함께 전달된다는 것이 의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영 다음 날 경차 무시 행태가 화제가 되고, 인터넷에서 그것에 대해 댓글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에 이 정도의 역할을 했다면 예능 프로그램으로서는 최고의 성취를 거둔 것이다. <미녀들의 수다>가 오래오래 한국 사회의 치부를 들추어내고, 그것이 토론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요즘처럼만 하면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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