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잘못 탄 ‘황금 낙하산’
  • 파리·최정민 통신원 (프랑스 정부, 최고경영자 거액 퇴직수당에 ‘제동’…)
  • 승인 2008.10.1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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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24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뉴욕 양심호소재단으로부터 ‘올해의 세계 정치인상’을 수상하고 있다. 왼쪽은 부인 브루니 사르코지. ⓒAP연합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가 프랑스에 상륙했다. “서민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금융 시스템이 만들어낸 금융 폭탄이 서민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격이다.” 지난 죠스팽 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바 있는 엘리자베스 기구 사회당 의원의 진단이다.

지난 10월6일 프랑스의 증권 지수인 CAC40은 9%나 추락했다. 프랑스2 방송은 지난 1987년 이래 최고의 낙폭이라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프랑스 상위 40개 기업의 자산 가운데 9%가 날아갔다”라고 덧붙였다.

‘신뢰의 위기’(르 피가로), ‘대폭락’(르 파리지앵), ‘공황 상태의 증권가’(르 트리뷴). 지난 10월6일자 프랑스 일간지들의 머리기사이다. 이번 금융 사태 초기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실하다고 평가받아온 프랑스 경제 또한 안전하지 못하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증시가 폭락하자 사르코지 대통령은 즉각 시중 은행장들을 소집한 후 기자들 앞에 나와 “어떤 예금도 위험하지 않으며, 정부는 유럽연합과 긴밀히 협조할 것이다”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런데 이처럼 대공황을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산 것은 미국 월가도 아니고, 부실 금융기업도 아닌 바로 황금 낙하산 논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최근 프랑스 정부가 30억 유로를 투자하기로 발표한 벨기에의 덱시아 사 전임 경영자의 퇴직수당이었다. 지난 9월30일 새벽 4시30분, 사르코지는 총리를 비롯한 관계 장관들을 꼭두새벽에 소집했다. 바로 벨기에 덱시아 사의 구제 대책을 시장 개장 전에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30억 유로의 투자가 확정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이 회사 악셀 밀러 회장의 퇴직수당이 4백만 유로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엘리제궁이 발칵 뒤집혔다. 뤽 샹탈 정부 대변인은 “충격이다. 당장 관련 법률을 제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프레데릭 르페브르 여당 대변인은 “프랑스 정부는 대주주의 권리로 퇴직금 지급을 반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같은 날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메데프의 로랑스 파리죠 회장에게 황금 낙하산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퇴임 당일 직원들의 박수 속에 눈물을 글썽였던 악셀 밀러 회장은 자신의 퇴직금 소식이 전해진 후 벨기에에서 여론이 좋지 않은 데 이어 프랑스 정부까지 들고 일어서자 퇴직상여금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에서 ‘황금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최고경영자의 퇴직수당에 관한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알카텔의 전임 회장이었던 파트리샤 루소의 경우 형편없는 성적과 함께 자리를 떠나면서 6백만 유로를 챙겨 빈축을 샀다. 에어버스의 모회사인 EADS의 전임 회장이었던 노엘 포르지아르는, A380의 납품 지연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경영 실적이 악화하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8백만 유로를 받았다. 더구나 그의 경우 납품 지연 사실을 미리 알고 주가 폭락 직전에 주식을 팔아치운 혐의로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당시 A380의 조립공장인 툴루즈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 이전설과 관련해 고용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중이었다.

사회당 “신자유주의 추진해온 정부가 웬 난리?”

▲ 최근 프랑스 정부가 30억 유로를 투자하기로 한 벨기에의 덱시아 사. ⓒAP연합

그동안 눈감았던 프랑스 여론과 정부는 이러한 관행을 이제는 내버려 두지 않을 기세이다. 이미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 9월22일 ‘올해의 세계 정치인상’을 수상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번 경제 위기를 두고 “이익이 있을 때는 챙기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모임은 뉴욕의 최고 경영자들이 대거 참석한 모임이었으며, 그 자리에는 프랑스 기업가이며 황금 낙하산 논쟁으로 법정 투쟁 중인 비반디 유니버설의 전 회장 쟝 마리 메시에도 있었다. 사르코지의 이런 강경 대응을 두고 프랑스 사회당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이미 황금 낙하산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오던 사르코지 정부가 이제 와서 웬 난리인가”라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관행처럼 자리 잡아온 황금 낙하산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한 나라는 네덜란드가 유일하다. 네덜란드 정부는 내년 1월1일부터 최고 경영자 퇴직수당의 경우 30%, 스톡옵션의 25% 그리고 퇴직 당시 임금 인상분에 대해서 15%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재 조치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암스테르담 시장에서 활동 중인 투자 자문가 로만 그로징거 씨는 “시장과 정부는 공생 관계이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기업이 들어설 리가 없다”라고 지적했으며, 실제로 네덜란드 경제인연합의 베르나르 위엔츠 회장 또한, 프랑스2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제재 조치로 세계 거대 기업들이 암스테르담을 피해 가는 것을 주시하고 있다”라며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르코지 행정부가 들고 나온 황금 낙하산 제재 조치 또한 논란거리이다.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과 전 유럽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그러나 프랑스 아탁 연구소의 프레데릭 아기탄 씨는 “지난 1980년대의 일반 노동자와 대기업 경영자의 임금 격차는 24배였으나 지금은 3백 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안에서의 이러한 과도한 빈부 격차는 시정되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반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투자 자문가인 마크 샤란티노 씨는 “이미 계속 존재했던 관행을 위기 상황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희생양 만들기’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황금 낙하산과 이번 금융 위기의 종착점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재고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과연 이대로 두고 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금융 시스템이 경제 성장의 견인이 되었던 아일랜드의 경우 국가 부도 상태에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과 거리가 멀었던 레바논은 중동의 주가 하락 영향 외에 별다른 피해가 없다.

지난 2006년 신자유주의적 고용 계약인 최초 고용계약법(1년 내에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있는 조치)이 발표되었을 때 프랑스 대학생들은 6개월간 시위를 벌여 정부의 철회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일명 ‘1000유로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폭발한 것이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두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냐시오 라모네 편집장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야만적인 자본만능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라고 논평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금융 시스템의 붕괴는 모두에게 신자유주의를 재고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까? 그것은 아마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일 어떤 은행이 쓰러질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처럼 말이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제 대형 은행들이 사라지고 합쳐지는 환경에 좀더 익숙해져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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