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만 남긴 초저금리 ‘단물’
  • 강용석 (미국 부동산 전문가) ()
  • 승인 2008.10.1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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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사회, 융자 조건 갈수록 까다로워져 발 ‘동동’…“세금 신고 제대로 할 걸”

▲ 다우존스지수가 심리적 지지선인 1만 포인트 밑으로 떨어지자 허탈해하는 투자자들의 모습에서 오늘의 미국 경제 위기를 읽을 수 있다. ⓒAP연합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은행의 최지점장. 2년 전만 해도 그는 부동산 중개인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밤낮으로 접대도 마다치 않았다. 융자 건이 생기면 자신에게 달라고 사정했다. 중개인들은 간혹 최지점장에게 융자를 알선해주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정이 역전되었다. 중개인들이 지점장을 만나자고 ‘몸부림쳐도’ 그는 리턴 콜도 하지 않는다. 융자를 주선해달라는 부탁인데 요즘에는 웬만한 포트폴리오로는 융자 조건을 맞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왜 융자가 힘들어졌을까.

50만 달러짜리 집을 산다고 가정하자. 주택 가격이 많이 내렸다지만 50만 달러짜리 집은 그리 좋은 집은 아니다. 먼저 구입가의 20%인 10만 달러는 다운 페이먼트(Down Payment)를 해야 한다. 다운 페이먼트는 일종의 종자돈이다. 예전에는 5%, 심지어는 노 다운 페이먼트로도 가능했지만 요즘에는 어림없는 얘기다. 그나마 20% 다운 페이먼트도 신용이 좋은 우량 고객들에게만 해당된다. 10만 달러를 다운 페이먼트한다면 40만 달러는 은행에서 빌려야 한다. 이자율 6.5%에 30년 고정 프로그램이라면 월 이자 상환액은 약 2천1백66 달러가 된다.

여기에 재산세와 보험료 등을 합치면 주택 관련 지출액은 월 2천8백 달러 정도에 이른다. 이만큼의 비용을 대려면 얼추 계산해도 연 수입이 11만 달러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금 보고서상으로는 도저히 융자가 안 된다는 것이다. 교민 대부분은 장사를 하면서 미국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에 세금 신고를 적게 하는 경향도 있다.

간혹 ‘원래는 이만큼 버는데 세금을 줄이려고 적게 보고했다’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이같은 편법이 미국에서 통할 리 없다. 주택 가격이 계속 오를 때는 ‘가짜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기도 했다. 은행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격이 오르고 있으니 사고날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은행의 ‘감시’가 심해져 가짜 서류는 꿈도 꾸지 못한다. 융자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다운 페이먼트 비율을 부쩍 올리거나 주택 구입을 미루는 수밖에 없다. 

요즘 은행원들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기준이 강화되어 새로운 융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금이 돌지도 않지만 현재의 융자를 지키기에도 바쁘다.

집값 오를 때는 ‘가짜 서류’ 내밀어도 은행에서 OK 했는데…

한 은행에 2백 건의 모기지 융자가 있다고 하자. 정상적으로는 매달 10여 건의 새로운 융자 건수가 발생해야 한다. 새로운 융자를 진행하려면 기존의 융자가 완불되면서 자금이 돌아야 하는데 현재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차압되는 주택을 살리기 위해 융자 조건을 조정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금이 얼마 전 미국 상하원을 통과한 구제금융이다. 요즘에도 융자 수요는 많다. 하지만 골라서 해준다. 한국 투자자에게는 더 까다롭다. 다운 페이먼트 비율이 올라간다. 최소 30%에서 40%는 있어야 가능하다. 미국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신용 점수가 없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은행인 윌셔스테이트 뱅크에서 모기지를 담당하는 진신씨는 “요즘 융자가 힘들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새 융자도 싼 집에만 몰린다. 주택 가격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가격이 만만치 않고 구입자들의 수입이 줄어 은행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주택 시장 전망에 관해서는 “2010년까지는 집값이 계속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5~6년 정도는 소강 상태를 보인다는 것이 상당수 경제학자들의 예상이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예전과 같은 주택시장 호황은 없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금융 경색은 왜 발생했고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시작은 200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낮은 금리 때문에 시작된 부동산 호황은 모기지 대출 확대로 이어진다. 그 중심에는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앨런 그리스펀이 있다. 그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시행했고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는 2003년 연방기금 금리를 연 1%대로 낮추었다. 이 비율은 무려 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은행에 저축을 하는 것이 바보였다. 대신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주택을 사거나 주식에 투자했다. 초저금리기조는 2006년까지 유지되었다.

▲ 지난 6~7년간 부동산 경기가 호황을 보이자 미국 건설업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주택을 지었다(위). ⓒ강용석 제공

2006년부터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고 이자율도 올랐다. ‘방화범’은 비우량 대출(서브 프라임)이었다. 집을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융자금을 제때 갚지 못하게 되자 서서히 부실 대출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집을 포기하면서 미국 경제 근간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고 금리가 인상되어 융자금을 갚지 못하게 되면 융자 기관이 손해를 보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이처럼 대형 사고를 불러온 배경에는 파생 상품이라는 ‘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금융 회사들은 추후에 발생할 수 있는 주택 차압이라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모아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y)을 만들어 금융시장에 내다팔았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주택저당증권을 종자돈으로 해서 채무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이라는 것을 발행했다. 여기에 이익 극대화를 노린 투자 은행(Investment Bank)이 가세하면서 발생한 파생 상품이 모기지의 원래 가치보다 부풀려져 거품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50만 달러로 50만 달러짜리 집 5채 샀던 ‘그때 그 시절’

투자 은행 최고 경영자의 도덕적 해이도 한몫 거들었다. 그들은 실적에 따라 보너스와 월급을 받는 이들로 고위험·고수익 상품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지난 9월 파산을 신청한 리먼 브라더스의 최고 경영자 리처드 펄드는 지난해 보너스로 1천3백75만 달러나 챙겼다.

최고 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일반 투자자들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지나친 욕심이 버블 붕괴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미국 부동산 투자 상식에 ‘지렛대 효과(Leverage Effect)’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50만 달러를 지니고 있을 때 50만 달러짜리 가옥을 한 채 사는 것이 아니라 50만 달러를 5등분해 10만 달러 씩을 다운 페이먼트로 투자해 50만 달러짜리 집 5채를 구입하면 투자 효과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물론 주택 가격이 많이 오를 경우에는 지렛대 효과가 나타나지만 반대로 집 가격이 하강 곡선을 그린다면 다운 페이먼트조차 날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막차를 탄 투자자들은 이 논리가 먹혀들지 않아 어마어마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교민들 중에도 이런 식의 투자로 코를 꿰인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업을 하는 고 아무개씨는 로스앤젤레스 외곽 전원 단지에 거주용으로 주택을 장만했다. 4년 전의 일이니 시기적으로 늦은 편은 아니었다. 산 집의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분양 가옥 5채를 더 샀다. 임대를 주면 은행 융자는 갚을 수 있고 잘하면 시세 차익을 챙기겠다는 계산이었다.

2년 정도는 그럭저럭 버티었으나 그 후부터는 가격이 빠지기 시작했다. 불경기가 닥치자 임차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빈 집의 융자 페이먼트는 물론 고 아무개씨의 몫이었다. 게다가 1년에 2번 내는 재산세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1년 정도는 친지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5채의 집은 은행 차압으로 넘겨졌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묻지마 투자’가 미국 신용 경색을 부추긴 면도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는 전세계에 확산되고 있다. 현재 미국 금융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실물 경제로 불길이 옮겨붙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도 장기 불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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