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못미’ 같은 신조어 잘 써서 ‘킹왕짱’ 되려나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10.21 15: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넷상에 통용되는 기발한 단어들 인기 일상의 대화에까지 등장해 세대 불문 ‘상용’

ⓒ그림 최익견

‘넘사벽’을 알고 있나요?” 인터넷에서 자주 쓰이는 이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면 인터넷과 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미를 알기는커녕 단어 자체를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면 인터넷과는 담을 쌓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더라도 댓글이나 커뮤니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댓글을 조금 살펴보다 보면 한 번쯤은 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넘사벽’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줄임말이다. 줄이기 전의 본딧말을 알더라도 의미와 용례를 보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써야 할지 알기 힘들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오픈사전에는 ‘주로 둘을 비교할 때 더 잘난 쪽의 잘남을 극도로 과장하기 위한 표현이다. 어마어마한 차이를 나타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다시 말해 노력해서 극복하기에는 너무 극명한 차이가 나는 뛰어난 대상에게 쓰는 말이 ‘넘사벽’이다.

예를 들면 지난 올림픽에서 8개의 금메달을 차지한 마이클 펠프스의 수영, 육상 100m에서 설렁설렁 뛰면서도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우샤인 볼트의 달리기, 장동건의 조각 같은 외모, 전지현의 늘씬한 몸매, 강동원·이나영의 작은 얼굴 등 스포츠와 연예계 스타들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물론 그 외에도 의미가 통하는 어떤 상황에든 대입해 사용할 수 있다.

생각 담은 짧은 줄임말에 뭉클해지기도

▲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위)는 지난해 말 최고 인기 유행어 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사실 ‘넘사벽’을 모르더라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조금의 불편함은 있을 것이다. ‘넘사벽’을 사용하는 세대와의 대화에 불편함을 경험할 것이고 방송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넘사벽’의 의미를 몰라 방송을 즐기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져 그 안에서 주로 사용했던 말이라도 일상의 대화 속에 등장할 정도가 되면 알아두는 것이 편하다.

‘넘사벽’ 말고도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 ‘킹왕짱(King, 왕, 짱의 합성어)’ ‘정줄놓(정신줄을 놓다)’ ‘흠좀무(흠 그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 ‘님좀짱인듯(상대방을 칭찬하면서 살짤 비꼬는 말)’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등이 사이버 세상에서 현실 세계로 들어와 있거나 대기 중이다. 대부분 처음 단어를 듣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지만 익히게 되면 특정 상황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대학생인 이 아무개씨(21)는 “인터넷상의 신조어가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재미만 있어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쓰임새가 많고 짧은 단어 하나로 내 생각을 담아낼 수 있어야만 계속해서 사용된다. 인터넷 언어를 아이들의 장난쯤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말했다.

‘하악하악’이라는 신조어를 제목으로 책을 낸 이외수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제986호)에서 “신조어를 만든 사람과 즐겨 사용하는 세대의 의도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지못미’가 그런 말이다. 설명을 해야만 전달이 가능하지만, 설명을 듣고 나면 마음의 분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느껴진다. 또, 자기 자신의 무력감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기도 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쉴 새 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주로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물이나 댓글에서 인상적이었던 말들이 유행을 타면서 신조어가 된다. 인터넷 언어가 양산되는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는 지난해 말 2007년 최고의 인기 유행어 투표를 실시했다. 여기서 1위를 차지한 말이, 뭔가 좋은 일이 생겼거나 훈훈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내뱉는 감탄사로 사용되는 ‘우왕ㅋ굳ㅋ’이다. ‘우왕ㅋ굳ㅋ’는 디시인사이드의 ‘카툰-연재 갤러리’에 ‘맨발의 시붕이’가 올린 <본격 미안해지는 만화>의 한 장면에서 사용된 표현이 네티즌들의 호응을 받으며 신조어가 된 것이다. 2위를 차지한 ‘킹왕짱’은 디시인사이드에서 특이한 아이디 찾기 놀이가 유행이었던 시기에 한 이용자가 사용하고 있는 ‘킹왕짱’이라는 아이디가 인기를 누리면서 신조어로 자리 잡은 경우이다.

인터넷에서만 신조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언어 구사가 좀더 자유로운 예능 프로그램이 신조어를 많이 만든다. MBC <황금어장>의 라디오스타 코너에서 신정환이 윤종신을 지칭하며 언급한 ‘예능 늦둥이’라는 말은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늦게야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각되고 있는 연예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신조어를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있다. 패널 대부분이 중·장년층 연예인으로 구성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세상을 바꾸는 퀴즈(세바퀴) 코너에서는 신조어의 의미를 맞추는 퀴즈를 냈다. ‘넘사벽’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반반무(양념 반 프라이드 반 무 많이)’ 등의 신조어가 문제로 나왔다.

“세대 간 언어 문화 단절” 지적도

인터넷 신조어 중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과정까지 이르는 말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 인터넷 신조어는 네티즌이나 트렌드세터들에게서만 통용된다. 네티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유행을 타고 신문·방송 등의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과정을 거친 일부 단어들만이 일상으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정인지라 신조어를 따라잡는 일이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인터넷과 친하지 않은 기성세대들에게는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는 인터넷 신조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 신조어가 세대 간의 언어 문화를 단절시키는 주요 요인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고는 한다.

지난 한글날을 전후해서 쏟아져 나온 사설·시론·평론에서도 인터넷 언어가 세대 간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고, 맞춤법과 문법을 무시해 한글을 파괴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인터넷 언어가 국어의 올바른 사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여러 차례의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온라인 취업 사이트 ‘사람인’이 지난 6월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조사 대상자들은 자신의 맞춤법 실력을 몇 점으로 평가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평균 72점을 주었다. 직장인의 64.1%가 업무 중 맞춤법 실수를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이유로 ‘별로 신경을 안 써서(22.8%)’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대답이 ‘인터넷 언어 사용이 많아져서(20.2%)’였다.

지난 10월9일 한글날을 앞두고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응답자의 73.8%가 종종 맞춤법 실수를 저지른다고 답하며 우리말 사용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인터넷상의 언어 및 맞춤법 파괴(40.9%)’를 첫 손에 꼽았다. 실제로 ‘완전’을 뜻하는 ‘오나전’이나 ‘하악하악’의 또 다른 버전인 ‘항가항가’, ‘뭡니까’를 의미하는 ‘미’는 자판 입력시 입력 오류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인터넷 언어는 신세대들의 표현 수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터넷 신조어가 온라인에서 급속하게 퍼지는 것은 어떤 권위나 책임감, 소속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새로운 자아가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인터넷 언어만큼 좋은 수단이 있을까. 그러다 보니 문법이나 본디 의미에서 벗어나는 일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얼마나 정확히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어령 교수 “언젠가는 시적 언어가 될 것”

인터넷 언어는 신세대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촛불 집회에 나섰던 10대들의 과감하고 재기 발랄한 표현은 기성세대들에게도 공감을 주었다. 

신세대들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신조어에서도 상황에 따라 더 적합한 단어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킹왕짱’ ‘넘사벽’ ‘님좀짱인듯’은 모두 대상을 추어올리는 말이다. 하지만 뉘앙스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킹왕짱’은 최고를 뜻하는 한 음절의 세 단어를 합쳐 놓은 만큼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낼 때 쓴다.
최고의 찬사라는 점에서는 ‘킹왕짱’과 닮아 있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대상에게 보내는 헌사인 ‘넘사벽’은 거리감과 한계를 동시에 표현한다. ‘님좀짱인듯’은 최고라는 의미와 짜증이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짱’을 쓴 것에서 냉소적인 칭찬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7월에 열린 18차 세계언어학자대회에 참석한 진 애치슨 옥스퍼드 대학 교수는 “요즘 세대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글을 쓰고 의사 소통을 하는 것은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며 그렇다고 언어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자신의 시집 출간 기자 간담회에서 “지금 인터넷에서 범용되는 언어가 언젠가는 시적 언어가 될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