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 물결치는 ‘가고 싶은 섬’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8.10.2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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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슬로’로 지정된 청산도 현지 취재 / 밭에서는 소쟁기질…해녀도 만날 수 있어

▲ 청산도가 있는 전남 완도의 전경. 청산도는 지난해 '가고 싶은 섬'에 이어 '치타슬로'로도 지정되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변화는 없다. ⓒ시사저널 임영무

기자는 바쁘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시쳇말로 똥줄이 탄다. 촌각을 다투며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는 치타슬로 지역 주민들은 동경의 대상이다. 지난 10월14일 치타슬로로 지정된 전라남도 4개 지역 가운데 완도의 청산도를 찾았다. 곳곳에서 <서편제> <해신> <봄의 왈츠> 그리고 <식객>을 통해 보았던 청산도의 자연미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평일인데도 완도에서 청산도로 향하는 배에는 3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청산도를 방문한 이유를 물었다. “여행 책자에서 추천해서” “크기가 큰 감성돔을 잡을 수 있어서” “사진 찍으러” 등등 다양한 이유가 나왔지만 정작 기대했던 “치타슬로로 지정되어서”라는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아직은 홍보가 부족한 듯이 보였다.

50분이 걸려 도착한 청산도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작은 어촌의 모습이었다. 차로 5분을 가자 어느덧 주위는 농촌으로 변해 있었다. 경기도 안산에서 온 관광객 장은숙씨는 “바다가 지겨우면 산으로 가면 되고 산이 지겨우면 밭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면 된다. 청산도의 가장 큰 매력이다”라고 만족스러워했다.

청산도 가정의 90%는 어업과 농업을 겸한다. 힘이 많이 드는 전복이나 김 양식은 젊은이들이 주로 하고, 농사는 어르신들이 짓는 편이다. 전통 농경 방식인 소쟁기질을 볼 수 있는 것도 노인들이 아직까지 생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콩밭에서는 도리깨질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청산도의 전성희 면장은 “청산도가 치타슬로로 지정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 전통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더라. 물질하는 해녀들의 모습도 외지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라고 말했다. 청산도에는 20여 명의 해녀가 있지만 물때가 아닌 탓에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는 전통 방식은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손은 많이 가는데 일손이 달리다 보니 바쁘다. 큰 가마솥에 멸치를 삶고 있는 주민에게 다가가 ‘치타슬로’로 지정된 이후의 변화상을 물었다. 주민 김종율씨는 “멸치가 가장 많이 잡히는 8월부터 1월까지는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얼마나 바빴으면 경기도에 있던 딸이 회사도 그만두고 여기 와서 일을 도왔겠나. 치타슬로로 지정되었다고 하지만 내 삶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타슬로 지역 주민들에게서도 삶의 팍팍함을 엿볼 수 있었다.

완도군, 청산도 주민들에게 향토 음식 등 관광 자원 개발 촉구

▲ 완도군 청산도 어민이 인근 해안에서 잡은 멸치를 삶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워낙 낙후된 지역이라 경제적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도 의외로 컸다. 그러다 보니 치타슬로로 지정되고 나서 주민들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구장리마을 주민 양순자씨는 “치타슬로가 옛날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한
주민들이 ‘평생 소로 쟁기질하면서 힘들게 살아야 하냐’고 발끈하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만큼 주민들에게는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만큼이나 삶의 여유를 위한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국화리 김응복 이장은 “치타슬로로 지정된 이후 크게 변화된 것은 없다. 빨리 좋은 사업이 들어와서 좀 여유롭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개발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하지만 치타슬로의 취지는 관광 산업 부흥이나 개발을 통한 돈벌이가 아니다. 청산도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느긋함과 후덕한 인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완도군에서는 주민들에게 슬로푸드 개발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다. 전성희 면장은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농산물을 생산할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전통 방식에 따라 된장이나 간장을 만들어 향토 음식을 상품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무엇을 소득으로 연결시킬지 정하지 못했다.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다”라고 설명했다. 

청산도는 문화관광부가 추진하고 있는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지로도 선정되었다. 이 섬에는 예산도 1백25억원이 책정되었다. 도로, 산책로, 마을 정비 등 하드웨어 사업에 60억원, 소프트웨어 사업에 40억원이 쓰일 계획이다. 예산은 2009년부터 3년간 단계적으로 집행된다. 가고 싶은 섬 추진위원회 양화승 위원장은 “아직 예산이 집행되지 않아 뚜렷한 변화는 없다. 편의시설이 갖춰지고 청산도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는 결국, 주민들의 소득 창출과 자치 역량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낙관했다. 치타슬로가 정신 문화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편의성과 위락시설에 중점을 둔다. 동시 지정이 오히려 양날의 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우려를 전하자 완도군청 문화관광과 이주찬씨는 “개발과 보존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겠다. 지켜봐 달라”라고 답했다. 

청산도는 치타슬로 후보 지역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후보지 등록 직전 청산도가 ‘가고 싶은 섬’으로 지정된 터라 주민들은 지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종식 완도군수는 치타슬로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 강력하게 밀어붙인 결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슬로시티로 지정될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청산도는 유채꽃밭을 비롯해 돌담길 등 천혜의 자연 경관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전통 생활 양식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연과 전통 문화를 보호하자는 슬로시티의 기본 취지와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고 난 이후 주민들 간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들었다.

19개 마을 가운데 개발과 지원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는 동네가 있다 보니 다른 동네 주민들이 섭섭해하더라. 또한, 지정에 따른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고 전례가 없어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이제는 주민들 스스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자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다.

주민들의 소득 창출을 위해 관광 개발을 추진하다 보면 자연 유산이 훼손될 수 있다.

도로 개설 등은 치타슬로 기본 취지에 반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제주도처럼 자극을 주는 상업적인 개발은 지양한다. 대규모 호텔이나 펜션을 짓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담을 돌담으로 바꾸고 슬레이트로 만든 원색 지붕들을 기와 지붕으로 바꾸는 식이다. 관광객이 불편해하더라도 마을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고 친환경적인 개발을 진행하겠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부산, 남해, 목포를 연결하는 남해안 선벨트 사업과 서남해안 관광레저 도시(J프로젝트) 건설 사업에 ‘완도 진입로 확보’를 담을 계획이다. 또한, 완도에서 시작해 제주도를 거쳐 부산까지 연결되는 해저 터널을 뚫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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