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참전’해야 했을까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8.10.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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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임 속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기록과 분석

▲ 명운화 지음 / 새움 펴냄
소설가가 인터넷 게임에 빠져 은둔 생활을 하다가 책을 냈다. 이 책은 그 은둔 생활의 결과물이다. 게임에 중독(?)되었던 사람이 펴낸 책이니 게임을 욕하거나 아니면 게임의 매력을 설파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의 이력을 들춰보니 인터넷 게임 중독의 폐해를 그린 <인터넷 게임, 우리 아이 해치는 끈질긴 유혹>이라는 책을 제작하는 데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인터넷 게임에 빠지게 된 동기 또한 그 책 때문이었다고 하니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을 찬찬히 살펴보니 게임을 욕하는 것도 아니고 게임의 매력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인터넷 게임 <리니지2>를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책이 아니면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소설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그런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두고 글쓴이의 행간을 따라가 보니, 저자는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들며 모종의 ‘리포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은 인터넷 게임에 열중했던 한 유저의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 것으로 운을 뗀다.

‘리니지2 바츠 서버에서 치열한 전쟁이 진행 중이던 어느 날, 타 서버인 페이샤르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Bi라는 20대 여성 유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평소 Bi와 알고 지내던 유저가 Bi의 가족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이 내용을 게시판에 올려놓으면서 이 참극은 순식간에 서버 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게시판에 올려진 글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Bi 캐릭의 접속 유무를 확인해보자 Bi는 여전히 게임에 접속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유저들은 현실 세계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녀의 분신인 Bi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알아냈다.

‘세컨드 라이프’ 살면서 ‘혈맹’도 만들고…

▲ ‘아덴성 공성전’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든 캐릭터들. ⓒ새움 제공
저자는 “평소 우울증 증세가 있던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새벽 시간에 게임 속 분신인 캐릭은 바닷가 돌섬에 앉혀놓은 채 자신은 현실 세계에서 스스로 몸을 빼낸 것이다. 주인은 세상을 등졌음에도 캐릭은 돌섬 위에 앉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유저들에게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리니지 월드에서만큼은 살아 있는 Bi 캐릭을 보기 위해 다른 유저들이 돌섬으로 몰려들자 Bi의 유족들도 차마 접속을 끊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저자는 3일간 이어진 유저들의 사이버 조문 행렬을 지켜보며 ‘리니지2 바츠 서버’에 깊이 빠져들었다.

MMRPG(다사용자 게임)의 역기능에 대한 많은 우려와 눈총 속에서도 한국의 인터넷 게임 산업은 세계 1, 2위를 다투며 2008년 현재 세계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다.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까지 ‘IT 한류’를 만들어내며 세계 게임 산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게임학(ludology) 연구자들은 “MMRPG는 게임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간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만들어낼 거대한 사회적 실험”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소설가 이인화씨는 이 책의 소재인 바츠 해방 전쟁을 “게임이라는 장르를 넘어 이제까지 인류사에 존재한 어떤 이야기 예술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서사 패러다임의 이야기를 출현시킨 경우이다”라며 그 가치를 높이 사고 있다. 게임학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이러한 내용을 두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며 주요 일간지에 ‘찬양’에 가까운 인터넷 게임 관련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런 평가를 등에 업고 ‘리니지2 바츠 서버’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졌던 유저들의 전쟁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유저들이 ‘바츠 대전쟁’ 또는 ‘바츠 해방 전쟁’ 등으로 불렀던 그 전쟁에서, 저자는 ‘종군기자’를 자청한 셈이다. 저자는 우연히 빠져든 인터넷 게임을 차마 거두지 못하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전개되는 현장을 현실의 역사적 현장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기록해나갔다. 문단과 가까워지려 애쓰던 소설가가 현실에서 벗어나 약 4년 동안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 유저들과 만나고 함께 전장을 누빈 것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가상의 세계는 말처럼 허구적인 세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가상의 세계가 현실 세계 못지않게 진정성을 띠어가고 있다. 지금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위하여 세컨드 라이프로서 가상의 세계를 찾아들고 있다”라고 자신의 체험을 정리했다.

판타지도 역사소설도 아닌 독특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새로운 장르 구분이 필요해 보이는 이 책은, 아직도 인터넷 게임이라는 가상의 세계 자체를 부정하거나 게임 중독의 폐해를 앞세우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유저’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게임은 게임일 뿐, 가상 세계는 가상 세계일 뿐이라고 하면? 게임에 중독되지 말자는 뜻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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