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 서양 흉내 내서야…”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08.10.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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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 / “겸재는 세계를 우리 속으로 끌여들여 재창조한 화가”

ⓒ시사저널 박은숙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최근까지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주로 40~50대 중장년층이 몰려들면서 길고 긴 줄이 미술관 앞 도로까지 이어졌다. 매년 봄(5월)과 가을(10월)에 겸재와 단원, 혜원, 추사 등의 그림과 글씨로 기획전을 열고 있는데 올가을에도 예외 없이 대히트를 쳤다.

간송미술관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 밖으로 빼돌려진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소장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간송은 지난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우고 찬란했던 우리 문화유산들을 갈무리해놓았다.

올해로 보화각 설립 70주년을 맞았다. 간송미술관은 기념전을 열면서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을 모두 등장시키는 초대형 전시 행사를 가졌다. 때마침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로 혜원 신윤복이 재조명되면서 전시회는 한껏 빛을 발했다. 혜원의 <미인도>를 비롯해 불후의 조선 명작들이 되살아나 현대 후손들과 조우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기획전의 한가운데에는 최완수 실장이 있다. 최실장은 지난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 기획전을 주도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겸재의 진경산수에 몰입하며 학문적인 성과물도 내놓아 학계로부터 ‘간송학파’라는 말을 끌어내기도 했다. <시사저널>이 최완수 실장을 만났다.


올가을에도 대성황을 이룬 것 같은데.

2주 동안 전시를 했는데, 그동안 20만명 정도가 다녀갔다. 너무 많은 관객이 몰려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와주었으면 하는데. 요즘에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 방영 시기와 맞물려 더 많이 오는 것 같다.

관람객들의 성향이 시절에 따라 바뀌었다고 보는가?

물론이다. 1971년 처음 겸재 작품을 전시할 때 오셨던 노인들은 지금 한 분도 안 계신다.

그때 제일 어렸던 관객이 노인이 다 되었으니까. 단골이었던 최경환 선생 같은 분은 지난해 봄 전시부터 안 보이시더라. 세대 교체가 된 것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도 1970년대에 간송미술관을 열심히 찾았다고 하던데.

운보가 괜히 운보가 아니지. 겸재 작품을 전시하면 문 열기 전에 9시부터 나타나 왔다갔다하다가 문 열자마자 한동안 감상하고 돌아갔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일과였다. 그러고는 그의 그림이 바뀌더라. 아 저 사람이 병신이 아니구나, 딴 놈들이 병신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했나?

세종부터 고종 시기까지의 작품을 총망라했다. 조선조가 망하기 직전 추사 제자들의 시대까지 담았다. <지곡송학도>는 세종 때를 대표하는 그림이고, 안평대군 글씨와 한석봉 글씨, 그리고 한석봉체가 유행할 때 정명공주의 <화정>이라는 휘호도 나왔다. 여자의 필력으로 당시 그렇게 웅혼함을 선보인 작품은 또  없을 것이다. 측천무후가 명필이라고 하지만 이 작품만큼 크고 힘찬 글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세대로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의 글씨,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추사,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눌 때 전기 문화의 말기를 장식한 이경윤의 그림 같은 것을 보면 중국풍의 물소를 청산하지 못했다. 중국 화풍에 매어 있다가 창강 조속 때에 이르러 사실적인 필치와 함께 까치도 등장했다. 조속 그림은 이번에 공간이 없어서 걸지는 못했다.

간송에서는 진경 시대 작품의 전시를 자주 한다.

진경산수화를 완성시킨 겸재 정선을 널리 알린 것이 간송미술관이다. 내가 많은 연구를 했고, 지금은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는가.

이번 전시에서 의미 있는 겸재의 작품을 꼽아보라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제대로 확립된 것은 겸재가 64세 되던 해이다. 당시 그가 그린 <청풍계>라는 그림이 바로 그 증거이다. 진경산수의 완성작이고나 할까.

겸재가 세상에 명화가로 알려진 것은 36세 때 그린 금강산 그림 때문이었다. 당시 겸재의 기본 화법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해악전신체라고 불렀다. 해악(海嶽)의 초상, 산수의 초상으로 생각하고 그린 것이다. 

이후 겸재는 경상도 일원의 산야를 담아 영남첩을 남기고, 60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작업을 하지 못하면서 상중에 머리로만 정리하다 탈상 이후 “강산의 제일 경치는 남한강이다”라며 단양팔경을 사생했다. 그렇게 경치 좋은 4곳을 사생하고 사군첩을 남겼다.

겸재는 우리나라 산수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을 모두 사생했다고 보는데, 그것들을 상중에 다 머리로 정리한 뒤 마음과 손을 일치시켜 내놓은 그림이 <청풍계>이다.

겸재는 직접 국토를 사생하고 ‘진경산수’를 탄생시켰다고 하지만 중국 고사를 인용한 그림도 많이 남겼다. 이는 상상의 중국을 그린 것인가?

겸재는 중국 고사를 그리면서도 나중에는 다 진경산수화풍으로, 다시 말해 조선식으로 재창조를 했다. <소상팔경도>와 <여산초당>도 다 조선식이다. 조선 산에 조선 소나무, 조선 초당에 조선 선비를 그렸다. 그것이 세계화 아니겠나? 세계를 우리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니까. 진경 문화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 문화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혜원은 어떤 인물인가?

관아재(조영석)가 풍속화풍의 시조라고 하는데 관아재는 겸재의 10년 후배이다. 관아재가 “겸재에 이르러 조선화가 일변했다”라고 존경의 뜻을 보이자 겸재가 스스로 인물을 잘 그리면서도 풍속화는 관아재가 시조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관아재의 풍속화를 완성시킨 이는 단원과 혜원이다.

사대부 화가가 새로운 화풍을 창조한다면 화원 화가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지 못하지만 곱게 정밀하게 완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인물 풍속은 관아재가 잘했다고 해도 그것을 정밀하게 발전시킨 화원 화가는 단원과 혜원이다.

드라마 때문인지 혜원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다.

혜원 집안은 8대에 걸쳐 의·역·주 등에 종사한 세습 중인 출신이었고, 부친인 일재 신한평은 화원 화가였다. 일재는 첨사(종3품) 벼슬까지 지냈고 75세까지 화원에 출사했다. 부친이 만년까지 화원에 출사하고 있었기에 혜원이 50대 초반까지는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경력을 놓고 여러 추측이 오가지만 혜원은 부친처럼 첨사 지위까지 올랐다.

이번 전시에서 일재가 그린 <자모육아도(慈母育兒圖)>도 <미인도> 밑에 함께 전시했다. 일재가 그린 그림인데 모델이 일재의 부인과 아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요즘 동양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동양화가 사라진 것이지. 산수도 그렇고 인물도 그렇고 지필묵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미국 그림, 서양 그림이나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요즘 동양화가들이 붓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말인가?

내가 이런 소리하면 굉장히 듣기 싫어하는데 교수라는 사람들도 대개 운필이 안 되고 있다. 붓질이 안 되니까 붓글씨도 안 되고. 지금 70, 80대 세대는 붓을 제대로 다루는데 이 사람들 책임이 크다. 자기들은 할 줄 알면서 제대로 안 가르쳤으니.

요즘에는 부모들이 아이 과제 때문에 박물관을 극성스럽게 찾고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도 그랬는가?

1970~80년대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우리 미술의 저변이 그리 넓지 않았으니까. 당시 서울대와 연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강좌를 열면 한 강의에 5백명 이상씩 듣고 했다. 분반을 하면 또 5백명이 넘고. 그때 우리 문화에 대한 욕구는 있었는데 가르쳐줄 만한 데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그 사람들이 일가를 이루고 가족을 꾸렸으니까. 그 이후로 점점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는 계층이 늘어났다고 할 수 있지.

간송 생전에는 기획전이 없지 않았나?

(수집물의 일반 공개에 대해) 간송이 말로는 직접 남기시지 않았지만 여기 설립 목적이 일제 시대에 폄하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연구를 통해 보여주는 것 아닌가. 이런 전시를 통해 그 유지를 충분히 받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명성이 자자해 사람들이 찾는데, 간송미술관의 시설이 너무 낙후되어 아쉽다는 이야기도 있다.

글쎄, 무슨 소리든 못하겠는가. 다 일장일단이 있다. (사람에 빗대)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전시회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다른 곳처럼 비싼 값을 받고 보여주고 그렇게 해야 되겠는가. 그렇게 해도 또 비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홈페이지가 있다면 더 널리 알릴 수 있을 텐데.

알리면 알릴수록, 세상과 관련을 맺으면 맺을수록 관리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이라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  박물관 기능은 보존·연구·전시 등 세 가지인데 여기는 전시 목적의 박물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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