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 끈 죄는 러시아 ‘과거’로 행군하려나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10.2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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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 군사력 증강에 나서 국방 예산 크게 늘리고 군 현대화 박차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맨 오른쪽)이 항공모함 쿠즈네초프 호에서 군사 훈련 중인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다. ⓒ이타르타스 연합

전세계가 금융 위기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러시아가 군사 대국으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대규모 군사 훈련을 목격한 미국 전문가들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붕괴 이후 제3 세계 수준으로 추락한 초라한 러시아의 군사력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정(stability) 2008’로 명명된 훈련에는 5천명의 병력과 함정, 전투기들이 참가했다. 작전은 러시아 영토의 11배를 넘는 광대한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소련 해체 후 이처럼 대규모 훈련이 실시되기는 처음이다. 러시아가 당장 특정한 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군사 행동은 그루지야를 포함한 남부 국경의 도발을 응징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공격을 겨냥한 것이 분명하다.

훈련의 피날레는 세계 최장 사정거리를 지닌 대륙간탄도미사일 3기를 발사하는 장관으로 장식했다. 북극의 바렌츠 해저에서 핵추진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사된 미사일은 장장 1만여 ㎞를 날아 태평양에 있는 적도 지역의 미확인 목표물에 명중했다. 주로 캄차카 반도에서 하던 미사일 훈련이 적도에서 실시된 것도 역사상 처음이고 그 상징성 또한 예사롭지 않다. 

공중?우주 방어 시스템 구축하고 함대도 신설키로

러시아 장성들은 미사일 사정거리에서 신기록을 수립했다고 자랑했다. 항공모함 쿠즈네초프 호에서 발사를 지켜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세계적 금융 위기에 상관없이 러시아는 강대국의 상징인 군 현대화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 미사일들이 여러 개의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제는 심각하다. 신형 미사일 시네바는 2030년께에 실전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메드베데프가 2주 만에 두 번째로 무르만스크에 정박한 북부함대를 찾아 발사 장면을 지켜본 것도 이례적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과 마이크 뮐런 함참의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인공위성 사진과 군사 전문지들의 보도를 수년간 분석해온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국방 경시와 예산 삭감 등으로 인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것이 이제는 먼 과거사가 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현재의 크렘린 지도층은 러시아 군사력을 냉전 시절 수준으로 재건하기로 작심한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군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현대 무기 구입 계획을 세우고 군인들의 훈련과 후생을 개선하는가 하면 과다한 병력을 대폭 줄이는 대신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하사관급으로 편성된 정예 부대도 창설했다. 최근 그루지야를 침공해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한 러시아의 행동을 비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에 변했다.

테러와의 전쟁과 핵확산 방지 노력에서 서방의 협조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이던 러시아는 돌연 꿈틀거리는 북극곰으로 변했다. 3주 전 메드베데프가 거창한 군 현대화 계획을 발표했을 때까지도 미국은 국내용 정치적 제스처이거니 하고 방심했다. 러시아는 2020년까지 새로운 형태의 함대를 창설하고 아직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공중 및 우주 방어 시스템을 새로 구축한다고 발표했다. 내년도 국방 예산은 근 30% 증가한 1조3천억 루블(5백억 달러)로 책정되었다. 소련 붕괴 후 최대 수준이다. 미국의 국방 예산에 비하면 아직은 작지만 러시아 군부가 뭔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심상치 않다. 메드베데프는 핵억지력을 강화하고 재래식 군사력을 업그레이드해 ‘항구적 전투 태세’를 갖추겠다고 다짐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군사 르네상스’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목적이 달성되면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전 소련 연방 소속 국가와 나토에 가입한 전 바르샤바조약 회원국들에게 당장 압력이 가해진다. 미국 캔자스 주립대학의 러시아 군사 문제 전문가 데일 허스프링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러시아 지도부가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는 외교 정책은 외교 정책이 아니다”라는 금언의 진리를 재발견했다고 말했다. 미국 국방대학의 유진 러머 교수는 최근 몇 주간의 사태를 보면 단순한 조짐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제 무대에서 사실상 무시되었던 러시아의 영향력이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금융 전문가를 국방장관에 임명하고 군 부패에도 칼 들이대

세계로 확장되는 러시아 해군력은 주목할 사례이다. 핵순양함 ‘피터 대제’ 호는 오는 11월 미국의 앙숙 베네수엘라와 합동 군사 훈련을 할 예정이다. 위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는 10억 달러가 넘는 무기 거래도 진행 중이다. 이른바 ‘베네수엘라 모험’은 그루지야 전쟁 당시 미국 함정들이 흑해를 휘젓고 다닌 도발에 대한 설욕이라고 미국 해군대학원의 미하일 치프킨 교수는 말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신경을 좀 건드려보자는 수작이다. 

러시아 군의 변신은 공교롭게도 지난 수십 년간 미군이 단행한 군 개혁 프로그램을 닮았다. 러시아는 유사시 사단 규모의 병력보다는 여단급 부대를 배치할 계획이다. 이는 미 육군의 방식을 복사한 것이다. 러시아 군부는 또한 하사관들의 급여를 올리고 주택까지 제공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복무하는 노련한 병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이것도 미국을 모방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변경했다. 러시아의 변화가 이 정도는 아니나  복무 기간 1년의 징병제를 바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현재 1백10만인 병력을 1백만으로 줄이는 계획도 발표했다. 냉전 막바지 소련 병력이 4백만이었던 데 비하면 놀라운 변화이다. 장교는 40만에서 15만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군부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다. 장성의 숫자도 1천1백명에서 9백명으로 줄었다. 이는 주로 예편에 따른 것이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러시아가 군부의 부패에 대해서도 칼을 들이댔다고 밝혔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보리스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인수할 당시 러시아 군부 예산의 40%는 도둑맞거나 낭비되었다. 이 때문인지 새 국방장관에 이외의 인물이 선택되었다.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장관은 군 배경이 없는 금융 및 세금 전문가이다. 그는 국방 예산 전반에 대한 대청소 작업에 착수했다.

러시아군의 재탄생은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옛 소련 시절의 영토들을 접수하기 위한 팽창 도미노가 시작되었다는 신호가 그것이다. 1948년 스탈린이 베를린 봉쇄를 통해 미국의 의지를 시험했듯 푸틴은 지금, 이라크 전쟁과 금융 위기로 고전하는 미국을 시험하고 있다. 끝없이 영토를 확장한 스탈린의 망령이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크렘린 문제 분석가들은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적 야망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 위기로 인해 추락하는 유가가 바닥을 칠 경우 군 현대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소련의 중앙 통제 경제가 크렘린의 강대국 야망을 지탱하지 못해 붕괴된 교훈을 감안하면 그럴 듯한 얘기이다. 유가가 계속 하락하면 메드베데프와 푸틴은 딜레마에 빠진다. 러시아 경제는 지난 8년간 유가 상승 덕분에 고도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방 지도자들이 러시아의 모험에 태연한 척하는 것도 푸틴이 안고 있는 함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틴의 행동을 위험한 도박으로 치부하더라도 서방의 심기가 편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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