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지게 먹더니 ‘배’ 꺼지나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8.10.2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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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정유사들 가격 담합ㆍ배타적 조건부 계약에‘철퇴’…“왜 우리만 문제 삼나” 불만

▲ 공정거래위원회가 그동안 관행처럼 저질러졌던 정유사들의 횡포에 칼을 빼들었다. 위는 국내 4대 정유사(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Oil Bank, S-Oil) 주유소. ⓒ시사저널 유장훈

정유·주유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주유사 간에 가격 경쟁을 유도하겠다며 주유소 판매 가격을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9월1일에는 한 주유소에서 특정 정유사의 석유 제품만 팔도록 했던 ‘상표 표시제’(폴사인제)를 폐지하기도 했다. 여기에 정유사와 주유소 간의 ‘배타조건부 계약’(전속 계약)에 대한 불공정 행위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이같은 일련의 대책들은 정유사 간 혹은 주유소 간 경쟁을 유도해서 석유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소비자가 직접 체감하는 휘발유값을 떨어뜨리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이같은 대책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추진되었으며, <시사저널>이 입수한 공정거래위원회의 비공개 문건인 ‘석유 제품 시장의 경쟁 촉진 방안’에서 확인되었다. 지난 4월11일 작성된 문건에 따르면, 상표 표시제에 대한 폐지 여부를 검토하고, 정유사와 주유사 간 배타조건부 계약 등 불공정 거래 관행을 조사해서 시정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이 문건은 경제 정책과 관련한 장관급 협의 기구인 경제정책조정회의(현 위기관리대책회의)에 보고된 것으로 전해졌다.

문건이 작성될 당시는 원유가 상승 등으로 휘발유 등 석유 제품의 가격이 한창 급등하던 시기였다. 이에 정부가 유류세를 인하했음에도 휘발유 등 석유 제품 가격은 계속 상승해 서민 생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유류세 내렸는데 석유 제품 가격은 계속 올라

문건에 따르면 “석유 원가 측면 이외에도 석유 제품 시장의 구조적·행태적 문제도 가격 급등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공정위가 지적한 석유 제품 시장의 구조적 문제점은 무엇일까. 공정위는 “우리나라 석유 제품 시장은 4대 정유사(SK에너지·GS칼텍스·현대Oil Bank·S-Oil)의 과점 체제로서 담합이 용이한 구조이다”라고 단정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4월 발생한 정유사 간 휘발유 등 가격 담합 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이와 함께 2002년 7월 속초 지역 18개 주유소의 가격 담합과 2000년 10월의 군납 유류 담합 사건 등도 거론했다. 이 가운데 지난해 발생한 정유사 간 가격 담합 사건과 관련해서 서울고법은 지난 1월 S-Oil에 대해서는 무혐의 판정을 내린 바 있으며, 나머지 3개사는 소송이 진행 중이다.    

공정위는 특히 정유사들의 주유소에 대한 배타조건부 계약(전속 계약) 등 불공정 거래 행위로 인해 실질적인 경쟁도 제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건에 따르면, 정유사들은 배타조건부 계약 등을 통해 주유소들에게 자기의 제품만 구매해 판매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정유사가 상표 사용과 자금 지원 등을 조건으로 자사 제품만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정유사와 주유사 간에 체결하는 계약서에 따르면, 주유소는 그 소요 제품 전량을 특정 정유사로부터 구매해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주유소에 대해서는 정유사가 서면 통지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공정위는 이같은 계약 내용을 불공정 거래 관행으로 본 것이다. 이와 함께 정유사가 주유소에 대한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유류 구입 대금을 사후에 정산하는 행위 등도 불공정 거래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배타조건부 계약은 정유사 간의 가격·품질 경쟁을 떨어뜨린다. 뿐만 아니라, 정유사가 주유소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할 필요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정유사의 석유 제품 가격 인하를 유도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수입업자가 유통망을 확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짐으로써 시장 진입 장벽으로도 작용한다”라고 진단했다.

공정위는 배타조건부 계약이 경쟁 사업자의 유통망 확보를 어렵게 하는 등 경쟁을 제한할 경우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 조항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계약 등을 통해 자사 대리점에게 경쟁 사업자 제품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경우 ‘배타조건부 거래’에도 저촉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정유사가 유류 대금 사후 정산 행위 등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서 주유소에 불이익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도 ‘거래상 지위 남용’을 적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주유소 열 때 자금 지원하고 캠페인도 해준다”

이에 대해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속 계약 제도는 다른 업종에서도 관행화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정유업계에만 불공정 거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주유소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정유사에서는 자금 지원이나 판매 캠페인 등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정유사가 ‘거래상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주유소에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라며 공정위의 지적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공정위는 이미 배타조건부 계약 등에 대한 실태 조사를 마친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는 정유사가 불공정 거래를 했는지에 대한 내부 검토 단계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조만간 공정위의 조사 결과와 시정 조치 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정유업계 안팎에서는 또다시 공정위의 철퇴를 맞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와 별도로 공정위는 문건을 통해 ‘주유소 상표 표시제’ 폐지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정유사 간에 제품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주유소 상표와 판매 제품이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정유사가 주유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정유사 간의 경쟁을 저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주유소 상표 표시제 폐지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이같은 공정위의 로드맵에 따라 앞서 언급한 대로 지난 9월부터 주유소 상표 표시제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만한 가시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고 있다. 상표 표시제 고시가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폴사인을 교체하거나 복수 폴사인을 내걸고서 여러 정유사 제품을 같이 팔겠다고 나서는 주유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폴사인제가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유소들은 일단 관망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정유사와 체결한 전속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주유소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계약 기간이 끝나야만 혼합 판매에 나서는 주유소들이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하지만 정유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주유소들은 폴사인제가 폐지되었다 해도 그동안 판매했던 정유사 제품을 그대로 판매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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