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연주 끝 처절한 여운
  • 김현준 (재즈비평가·EBS 기획위원 ()
  • 승인 2008.11.0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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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국악 밴드 ‘예산족’과 재즈 전문 ‘SMFM 오케스트라’의 10월 공연이 남긴 것

▲ ‘SMFM 오케스트라’의 재즈 연주자들이 경쾌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최윤석 제공

지난 10월, 나흘 동안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일련의 뜻 깊은 공연이 열렸다. 퓨전 국악 밴드 ‘예산족(藝山族)’이 연주를 펼치고, 재즈를 기반으로 한 ‘SMFM(Seoul Meeting Free Music) 오케스트라’가 뒤를 이었다. 일단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행사는 여지없는 실패작이었다. 겸연쩍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관객이 찾아왔고, 십시일반의 정성으로 이 공연을 마련한 주최측은 곧이어 닥칠 금전적 손해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런데 객석에 앉아 있던 필자는 수차례 ‘행복감’을 맛보았다. 다른 관객들도 예외 없이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다. 당시의 연주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땅에서 마주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음악이었고, 훗날 우리가 집필하게 될 대한한국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순간이었다.

경제와 정치 현안에 밀려 잦아들었지만, 한동안 사람들은 저작권 관련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시했다. 온라인상의 불법 다운로드와 맞물리며 오간 얘기 중에서 필자는 다음의 일갈을 잊지 못한다. “음악인들은 대중에게 호소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사서 듣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좋은 음악을 만들라.” 한때 이 땅에는 용돈을 아끼고 차비를 줄여가며 음악을 구매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열악해진 경제 사정과 문화 생활의 패러다임이 변한 탓이겠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사실 10년 전과 비교해 우리의 음악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장르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세계적 추세와 수준을 넘어선 경우도 있다. “좋은 음악이 없다”라는 얘기는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거나 대중 매체의 무책임함을 지탄하는 애정의 목소리이다.

흥행과 거리 먼 ‘실험’ 무대…관객은 ‘열광’

‘좋은 음악’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음악은, 듣는 이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 삶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멘토일 수 있고,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무심코 듣는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 훌륭하다고 얘기할 수 없으며, 장터에서 좌판을 깔고 앉은 아주머니의 흥얼대는 트로트 자락이 미천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는 더욱 없다. 문제는, 지금처럼 경제가 요동치고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음악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배부른 자의 신선놀음으로 오인되는 현실이다. 누구든 자신이 설정한 지향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을 꾸리기 위해 애쓸 뿐이다.

물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한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고 해서 음악의 심오함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비싼 차와 비싼 집, 비싼 음식이 삶의 위안을 안겨준다면 돈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진리가 하나 있다. ‘돈이 풀어주는 문제는 돈이 없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음악을 통해 감동을 얻는다는 것은 적지 않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 아는 만큼 들리는 것이 음악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번에 감싸 안을 수 있는 이른바 ‘국민가요’는 1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이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오래도록 음악에게 곁을 준 팬들은 되레 경제적으로 녹록치 않은 삶을 사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들은 음악에게서 삶의 위로를 구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안타까운 것은 그 최소한의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지, 음악을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소개한 ‘예산족’과 ‘SMFM 오케스트라’는 무엇 때문에 ‘들을 만한’ 음악이라는 평가를 얻는가. 필자는 이 공연을 전후해 객석에 자리했던 이들과 가능하면 많은 대화를 가졌다. 그리고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기 힘든, 이 실험적인 무대를 마주한 사람들이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또 하나 고무적인 사실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공연을 보았던 이들마저도 상당한 감흥을 얻고 홍조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양한 음악 펼칠 수 있는 여건 아쉬워

예술론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대중이 같은 음악을 즐기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공연이더라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오는 이들은 예술의 다양성을 갈구한다. 방송을 비롯한 주류 매체가 보여주지 않는, 그러나 자신의 심금을 울릴 음악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이런 공연을 보기 위해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든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온갖 매체가 떠들어대는 공연일수록 표를 구하려면 심지어 수십만 원까지-막상 그 음악적 가치를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들여야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에는 1만원에서 많아야 3만원 정도의 입장료가 책정된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3만원도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1년에 많아야 두어 번,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위해 그 정도의 돈도 아깝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필요조차 없다.

‘예산족’과 ‘SMFM 오케스트라’의 음악 속에는 국악과 현대 클래식, 그리고 재즈의 향취가 뒤섞여 있다. ‘예산족’은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연주상’을 수상하며 음악성을 인정받았고, 이미 국악인들 사이에서는 명성이 자자하다. 10년 넘게 지속된 퓨전 국악의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원초적인 음악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뒤흔드는 힘과 카리스마를 지녔다. 프로젝트로 시도된 ‘SMFM 오케스트라’에는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젊은 재즈 연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매순간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들의 즉흥적인 무대는 연주자들 자신에게도 새로운 방법론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렇듯 소중한 음악이 왜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회자되지 못하는가. 핵심은 결국 시각이다. 큰돈을 벌지 못하면 가치마저 없다는 천박한 생각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한, 이 땅의 음악은 휴대전화 컬러링에 머무를 것이다. 이 와중에 대다수 매체는 더욱 더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대상만 조명하기 일쑤이고, 미처 부각되지 못했지만 반드시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를 골라낼 만큼 순수하지 못하다.

또, 경제 상황이 좋아지면 여러 공연장에 다양한 관객이 모여들지도 의문이다.

▲ ‘예산족’(위)은 지난 3월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연주상’을 수상했다. ⓒ이길훈 제공

‘예산족’과 ‘SMFM 오케스트라’의 공연에 참여한 연주자들처럼,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지 못할 바에는 음악인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 한 가지 때문에 경제적 실패를 ‘확신’하면서도 공연은 강행되었다. 연주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삶의 여유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때로 민망해서 고개를 못들 정도이다. 꽤 성공했다는 어느 공연 기획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돈 안 되는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말을 들었다. 울컥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이내 허허 웃고 말았다. 돈의 위력을 잘 아는 필자 역시 소심한 필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처절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음악의 존재가 더욱 절실하다.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린 우리이다. 그들마저 사라진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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