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 의문의 계좌에 엄청난 돈이 들락거렸다?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11.04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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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행 공동 창업주 고 황덕룡씨의 한국 동거인 이었던 박 아무개 여인이 황씨로부터 받은 조 단위의 거액 통장이 DJ 비자금에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박씨측은 신한은행 관련 계좌까지 들먹이


DJ비자금’ 의혹이 다시 살아났다. 비자금설이 터졌다 하면 그 은밀함 탓에 늘 의혹 제기 차원에서 불씨가 사그라지곤 했다. 특히 전직 대통령이 연루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경우처럼 일부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대개 정쟁의 수단으로 악용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이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또 DJ 비자금 의혹이 불거지자 정치권에서도 ‘흘러간 추억의 노래’쯤으로 흘려듣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동교동측은 이번 기회에 아주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듯 의혹을 제기한 현역 의원을 검찰에 고소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번에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제기한 의혹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는 “DJ 비자금의 일부로 추정된다”라며 100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사본 한 건을 공개했다. 또 “신한은행 설립 당시 비자금이 조성되어 그 문제에 대해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당시에 개입했고, 이희호 여사 쪽으로 자금이 흘러나간 정황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기자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두 번째 의혹 제기 부분이었다. 2~3개월 전 전직 국정원 간부를 지낸 한 관계자로부터 관련 내용을 접하고 그동안 취재해온 내용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주의원측에 확인한 결과, 기자의 취재 사건과 주의원의 발언 내용은 동일했다. 취재의 첫 출발점은 상당히 막연했다. 접근하면 할수록 경악을 금치 못할 내용들이 튀어나왔고 급기야는 다소 황당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의혹 제기했던 주성영 의원 “검찰 수사 지켜보자”

▲ 10월20일 오전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진행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감에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며 질의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주의원의 발언으로 예상보다 다소 일찍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오히려 의혹만 더 부풀리는 형국이 되었다. 주의원측은 “일단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라는 입장이고, DJ측은 “터무니없다”라고 반응하고 있다. 신한은행측에서는 관계자와 통화하고 e메일로 질의서를 보냈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의혹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인지, 진실성이 있는 것인지를 가려보기 위해 취재수첩을 다시 열었다. <시사저널>은 이 사건이 김 전 대통령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의혹을 제기하는 당사자가 분명히 있고,  실제 이들에게 수많은 사람이 문제 해결을 자처하며 접근한 사실을 확인함에 따라 의혹투성이인 신한은행 비자금 사건의 전말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그 숱한 내용 가운데 가급적 확인된 내용과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내용을 중심으로 그 의혹에 조심스럽게 접근해보고자 한다. 현재 이 사건은 대검 중수부에서도 내사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하고 나선 이는 박 아무개 여인(52)과 그녀의 친오빠인 박 아무개씨(57)였다. 아직은 자신의 신상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고 있는 박여인과는 달리, 오빠 박씨는 기자에게 신상 공개에 대해 동의했다. 하지만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본명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1년 5월 재일교포 사업가 30여 명에 의해 ‘신한금융개발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당시 일본 지바 현에서 ‘덕진상호신용금고’를 운영하고 있던 황덕룡씨였다. 현재 신한은행의 창업주로 알려진 이희건 신한금융지주 명예회장은 당시 오사카에서 ‘무진상호신용금고’를 운영하며 황씨 등과 뜻을 모았다. 신한은행은 이런 재일교포 사업가들의 자금으로 1982년 6월2일 설립되었다. 당시 황씨에게는 일본에 가족이 있었으나, 한국에도 동거인이 있었다. 박여인이었다. 

그런데 황씨가 일본에서 1986년 11월 사고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황씨와 정식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탓에 박씨는 유산에 접근할 수도 없었고, 또 유산을 받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황씨가 남기고 간 일본의 호텔 등 여러 사업체는 모두 일본 가족에게 넘겨졌다. 독신으로 생활해온 박여인은 지난 2005년 1월께 일본에서 다니러온 황씨의 형제들과 주변 지인들을 통해 뒤늦게 황씨가 사망하기 전 박여인 명의로 개설해놓은 통장과 거액의 잔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박여인은 직접 신한은행을 방문했다. 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에 잔고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갑자기 하루가 멀다 하고 숱한 사람들이 박여인을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한결 같았다. “당신의 명의로 거액의 돈이 숨겨져 있다. 내게 위임장을 써주면 해결해줄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박여인은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오빠 박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박씨조차 “브로커들의 사기에 놀아나면 안 된다”라며 동생을 나무랐다. 그런데 단순히 브로커들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고위직에 있었거나 현직에 있는 인사들이 은밀히 접근을 하고 자료까지 제시하기 시작했다. 박씨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때부터 자신의 해외 지인들을 최대한 동원해 도움을 청하고 다녔다. 은행측의 비협조로 국내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했던 박여인 명의의 계좌를 해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쇄가 가능한 자료는 모두 인쇄를 했다. 인쇄 자체가 금지되는 자료는 직접 옮겨 적었다. 이후부터는 오빠인 박씨가 직접 진실 확인에 나서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자신의 직장과 사업체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국내를 정신없이 오가며 자료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46면 딸린 기사 참조).

박씨가 전하는 내용과 제시한 자료는 실로 엄청났다. 금액만 해도 억 단위가 아닌 조 단위였다. 가히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주변에 자문을 구해보아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일단은 세 단계로 나눠서 차근차근 실체에 접근하기로 했다. 우선 황씨의 실체와 박씨 남매의 진정성이었다. 박여인 명의의 비밀 계좌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그 다음 단계였다. 마지막으로 그 계좌가 실재한다면 실제 DJ 비자금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었다. 

박씨 “조 단위의 잔고가 기록된 계좌 내역서 사본 확인” 주장

▲ 대검이 박씨가 제기한 의혹에 대해 내사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박용석 중수부장(왼쪽)과 최재경 수사기획관. ⓒ연합뉴스

첫 번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기자는 박씨 남매를 꾸준히 접촉했다. 박씨는 직장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관계로 한국에 머무르는 일이 드물었다. 박여인은 “아직은 언론에 나설 때가 아니다”라며 만남을 꺼렸다. 지난 10월 중순과 말께 이들 남매를 각각 어렵사리 몇 차례 만났다. 일부러 인터뷰 장소를 그들 각자의 자택으로 택했다. 그들이 제시하는 사건 자료뿐만 아니라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비교적 형제가 많은 편인 박씨 남매의 다른 형제들 및 친인척 몇몇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박여인의 친언니인 박 아무개씨(55)는 전통주 제조업체 CEO로 언론에도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는 인물이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던 신한은행 공동 창업주라는 황씨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일본에는 그의 다섯 남동생들과 부인 및 다섯 딸이 있다. 이들은 황씨가 남긴 여러 사업체들을 이어받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실제 1985년 일본에서 테러로 의심되는 사고를 당했으며 치료 끝에 결국, 1986년 11월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황씨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서로 알고 지냈던 기업인 이 아무개씨(68)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일본의 대기업인 M사의 간부를 지낸 전력을 소개했다. 그는 “1978년부터 일본에서 황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신한은행 설립 준비 당시 재산 규모가 프랑스와 하와이의 호텔 등 오히려 이희건 명예회장보다 많았다. 그로부터 생전에 신한은행 설립 과정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황씨는 한국에서 알게 된 박여인을 끔찍이 사랑했으며 서울 명일동에 아파트를 사주어 함께 지냈다”라고 전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황씨의 존재와 박여인과의 관계 등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두 번째 의문은 과연 박여인 명의의 신한은행 비밀 계좌가 실재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박씨가 제시한 자료는 11개 계좌의 거래내역서 사본이었다. 모두 계좌번호가 명시되어 있었고 박여인 명의로 되어 있었다. 서류상에는 11개 계좌를 합쳐 조 단위의 잔고가 남아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서류의 진위 여부와 함께 입수 경위에 대해 의심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현재도 국내외의 지인들을 최대한 동원해서 자료를 더 입수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노출은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씨가 증인으로 제시한 관계자들도 있지만 객관성을 담보할 만한 은행 내부 관계자는 취재진의 접촉을 아예 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적으로 박씨의 개인 증언에 의존하는 형편으로는 확신을 담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뭔가 의혹의 실체가 있다는 정황은 확연했다. 박여인이 2005년 1월 직접 신한은행을 다녀간 후부터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박씨 남매조차도 그들을 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여기저기 소지하고 있던 명함들을 통해 기억을 되살렸다. 그중에는 변호사는 물론, 총영사를 지낸 전직 고위 외교관, 신한은행 내부 관계자, 금감원 등 금융 기관의 현직 간부, 각종 법인 단체의 간부들이 있었다. 

2005년 5월께 미주 지역의 전직 총영사였던 김 아무개씨가 부인과 함께 박여인을 직접 찾아와서는 “해지되었던 당신 명의의 통장 6개가 은행 본점에서 비밀리에 사용되고 있다. 본점의 이○○ 과장이 2005년 4월13일 해지되었던 통장으로 자금을 이체했다. 당신의 도장을 위조해서 은행이 사용하고 있으며, 그 스님들이 접근하면서 시스템을 막았다”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신한은행 고위층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김씨가 찾아오기에 앞서 2005년 1월 한 사찰의 스님이라는 김 아무개씨(84)와 양 아무개씨(53) 등이 박여인에게 “비밀 계좌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라며 접근했다고 한다. 박여인은 이들의 요구대로 자신 명의의 신한은행 통장 6개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도장까지 요구하는 이들을 박여인이 불신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통장을 갖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박여인은 재빨리 4월8일자로 통장 6개를 모두 해지했다. 그녀는 지금도 6개 통장에 대한 계좌번호와 발행 지점을 적은 메모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의 한 IT 전문 업체인 ㅎ사의 김 아무개 대표이사 역시 동행인 한 명과 함께 명함을 내밀고 접근했다. 그는 “서류가 첨부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씨 등은 이미 스님들 이야기와 신한은행 이과장에 대한 내용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변호사도 제법 많이 찾아왔다. 모두가 그쪽에서 먼저 접근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 아무개 변호사는 박씨측과 ‘사건을 해결해줄 경우 찾은 재산의 3%를 갖는다’는 공증서까지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김 아무개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당시의 고위직 인사를 비밀 장소에서 만나게 해주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이 아무개 변호사는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접근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1월 이후 전·현직 고위 인사 수십 명이 박여인 찾아와

위에서 언급한 인사들은 현재도 모두 확인이 가능한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박씨측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한 언급은 회피했지만 부인하지도 않았다. 외교관 출신의 김씨와 스님이라고 접근한 사람들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신원이 확실치 않거나 모 단체의 회장, 사무총장 등의 직함으로 명함을 내민 인사들도 숱했다. 확인해본 결과 현재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크게 신뢰할 만한 수준이 아닌 단체들이 많았다.
명함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박씨측이 기억하는 인사는 또 있었다. 2006년 5월 금감원의 한 고위직 간부도 만났다고 한다. 박여인은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분이어서 지인의 소개로 어렵사리 사무실 근처에 찾아가서 만났다. 그는 해지된 내 명의의 통장에 입출금이 된다는 사실은 확인해주었으나 그 이상은 자신도 공무원 신분이라 어렵다. 좋게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라며 자신의 신분 보호를 요구했다”라고 한다.

박씨는 국정원측 관계자와의 접촉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쪽에서 직인을 요구하며 제시했다는 문건 6장을 공개했다. ‘업무처리서’라는 제목의 문건은 2007년 5월21일자로 적혀 있었다. 위임장과 기증의향서, 보안각서, 포기각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의는 ‘처리위원회’로 되어 있었다. 기증의향서에는 박여인이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에 ‘신한은행 계좌에 입금된 본인 명의의 예금 잔액 전액을 무의 기증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문건을 건넨 사람은 국정원 에이전트라고 하는 이 아무개씨로 건설업자 명함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이 문건에 대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양식이나 용어로 볼 때 내부 문건은 아니다. 외부 기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당시 박여인을 접촉한 적이 있던 한 인사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그는 평소 기자와도 친분이 있는 인사였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공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핵심 측근들과 비교적 가까운 인사였다. 그는 “후배의 부탁으로 박여인을 만나는 자리에 합석했다. 아무래도 그 후배가 내 인맥을 은근히 박여인에게 과시하려 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한때 연계해서 시중에 떠도는 차명 계좌 등을 일제히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지하 경제에 떠도는 ‘검은 돈 정리 작업’에 나선 것이다. 그 리스트도 있었다. 내가 확인한 것으로는 모두 52건이었는데, 돈의 규모가 자그마치 모두 몇백조 원 규모였다. 그래서 조사팀에서 당사자들에게 ‘신분 보장도 해주고 조사를 통해서 개인 자산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아닌 것은 국고로 환수하겠다’라고 설득했는데 결국, 잘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 의문의 계좌가 왜 DJ 비자금과 연계가 된 것일까. 박씨가 이를 직접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박씨는 “괜한 정쟁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본 것을 본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자신이 해외 지인의 도움을 통해 여동생 명의인 의문의 계좌 11개 중 일부 해외 계좌로 송금된 입출금 거래내역서를 해외에서 모니터로 직접 확인했다는 증언이었다.  김 전 대통령과 관계된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나와 있어 단순히 동명이인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그 서류는 없었다. 박씨는 “그 모니터는 열람만 가능할 뿐 프린트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자료를 꼭 확보하겠다”라고 밝혔다.

박씨 남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 일각에서도 DJ 비자금 관련설에 대해서는 “현재 박씨의 증언만으로는 그 신뢰성을 담보하기 힘들다”라는 의견이 팽배하다. 검찰 역시 그와 같은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10월30일 저녁까지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그날 밤 11시 비행기로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했다. 출국 직전 그는 기자에게 “신뢰할 만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기다려달라”라고 말했다. 무엇이 평범했던 이들 남매를 다시 DJ 비자금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내내 그 생각이 기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 국정원측의 에이전트라는 한 인사가 박씨에게 서명을 요구하며 제시했다는 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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