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단체, ‘초심’을 벌써 잊었나
  • 이홍균(성균회대 연구교수 · 사회학) ()
  • 승인 2008.11.11 14: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국회·사법 기관 감시하며 국민에게 전폭적인 지지받은 민주화 주역…보이지 않는 지지자들이 등돌리는 의미 깨달아야

▲ 이홍균 ( 성공회대 연구소 · 사회학)

불과 7, 8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시민들은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 속에서 한국 사회 발전의 희망을 발견했고, 시민·사회 단체들은 각종 조사에서 한국 시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으로 손꼽혔다. 그 이유는 한국의 시민·사회 단체들이 민주화 과제에 치중하는 동안 그에 가려 있었던 국내에 해결되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의제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국내외의 많은 기대와 호응 속에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해냈다.

정치·경제·언론·문화·행정·교육·의정 감시·감사·성차별·부정부패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민·사회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그들은 정부의 정책 결정, 대기업의 지배 구조, 세금의 사용, 부정부패, 행정의 부조리, 성 평등, 국회의원들의 활동 등 과거에는 그리고 개개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과 감시·소송·입법 제안 등을 감행했다. 그것은 상근자가 있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를 전문가와 함께 해석할 수 있는 조직된 시민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는 거의 폭발적이었다. 언론의 조명은 집중적으로 시민·사회 단체로 향했고, 시민·사회 단체의 주장과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었다. 정부도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과 주장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시민·사회 단체는 국회의원이나 정당의 역할, 정부의 역할, 사법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은 민주화의 주역으로서 그리고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공고화에도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은 한국 시민 사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만했다. 그들은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에서, 시민들의 현시적 지지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세상 만들기를 위한 신념으로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있었다.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의 재정적인 궁핍은 많은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그들이 자신의 희생으로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잠재적 지지자들을 현시적 지지자로 바꾸어왔던 시민·사회 단체의 힘이었다. 한국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 말미암아 너무 많은 요구와 너무 많은 기대가 시민·사회 단체에 부하되는 것이 문제였을 정도였다. 그것은 행복한 고민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서서히 시민·사회 단체를 질시하는 세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민·사회 단체에 걸맞지 않은 잣대로 시민·사회 단체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것도 시민·사회 단체에는 행복한 고민이었다.

너무 많은 요구와 기대가 문제였을 정도

▲ 검찰이 정부·기업 보조금 수천만 원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환경운동연합에 대해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품이 담긴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제5의 권력, 제3 섹터 등으로 일컫는 말 중에는 시민·사회 단체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시민·사회 단체는 ‘논리적으로’ 스스로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견제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투명성·정당성·공정성은 시민·사회 단체의 속성이어야 했다. 시민·사회 단체는 ‘논리적으로’ 좀더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고 있는 공론의 장에 의해 감시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고, 시민 사회의 지지가 시민·사회 단체의 생명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금이 그들의 수입원이 아니고 이윤이 그들의 수입원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지지가 그들의 활동의 원천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말한 일반 의지가 그들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 시민·사회 단체들의 활동가들이 그 시민·사회 단체의 생명의 근원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 것인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걱정은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이 조금씩 위축되어가기 시작했던 2000년대 초반부터 생겨났다. 갑자기 시민·사회 단체의 인지도와 시민·사회 단체에 대한 지지도가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시민·사회 단체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시민·사회 단체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시민·사회 단체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시민·사회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 회비를 납부하는 지지자들을 현시적 지지자들이라면, 잠재적 지지자들은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거나 회비를 납부하지는 않지만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시민·사회 단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고 눈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잠재적 지지자들이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 것이 시민·사회 단체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극소수의 활동가와 소수의 현시적 지지자들 뒤에 수많은 잠재적 지지자들이 존재했었기에 시민·사회 단체들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이른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내외부의 비판은, 잠재적 지지자들이 있는 한, 무시되어도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에 대한 관심 역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가 되고 싶어 했었고, 많은 이들이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을 격려하고 있었을 때를 그리워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민·사회 단체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쌍방 아닌 일방 소통이 문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잠재적 지지자들을 현시적 지지자로 만들어내거나 활동가로 만들어내지 못할망정 왜 그들의 마음을 떠나가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시민·사회 단체의 냉철한 반성이 필요하고 그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소견으로 그 하나의 이유는 시민·사회 단체의 역사 20여 년 동안 시민·사회 단체는 그 생명의 근원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한국의 시민·시민 사회를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한국 정부에 의한 시민·사회 단체 의제의 수용 때문이라고 본다. 시민·사회의 판단, 시민·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일반 의지를 자신의 생명력으로서 좀더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민·사회 단체가 의존해야 하는 것은 투명성·공정성·정당성이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 잃어버렸고 그에 따라 시민·사회 단체의 생명인 시민 사회의 지지 역시 사라진 것이다.

시민·시민 사회와 상호 소통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민·사회 단체가 제시한 의제를 시민과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용하도록 했다. 몇몇 전문가들과의 숙의에 의해 결정된 내용으로 시민과 사회를 선도하려고 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쌍방통행적 소통이 아니라 일방통행적 전달이었다. 그 의제들 가운데는 시민·시민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고, 그것이 시민·사회 단체로부터 잠재적 지지자들이 떠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 단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시민·시민 사회에 알림과 동시에 시민·시민 사회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일에 치중하지 못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