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날 올까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8.11.25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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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없는 가운데 ‘존엄사 권리 법적 인정’ 요구한 소송의 첫 판결 주목

▲ 중환자실에서는 ‘방어 치료’로써 연명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많다.

존엄사(尊嚴死) 논쟁이 다시 의료계에서 달아오르고 있다. 존엄사는 소생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延命) 치료를 하느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치명적인 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존엄사 문제를 공론화해 사회적인 합의를 끌어내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존엄사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중환자나 난치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편안하게 숨을 거두게 하는 안락사(安樂死)와는 다른 개념이다. 존엄사는 환자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불필요하고 과다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안락사는 인위적으로 죽음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프랑스·독일 등 의료 선진국은 환자가 연명 치료를 받지 않고 품위 있게 죽겠다는 의사를 평소 글이나 유서 등으로 남겨두면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존엄사와 관련한 법과 제도가 없다. 실제 2004년 보호자 요구로 뇌수술 환자를 퇴원시킨 서울 보라매병원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들의 목숨을 살려가며 ‘방어 진료’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회복 불능 판정 받자 연명 치료 중단해달라며 병원 상대 소송

최근 의료진으로부터 회복 불능 판정을 받은 75세 할머니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영양 공급, 심폐소생술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존엄사 권리의 법적 인정을 요구한 국내 최초 사례이다. 오는 11월28일 이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오면 존엄사를 둘러싼 논란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 할머니의 경우 뇌간의 일부가 살아 있어 반사 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대뇌피질이 파괴되었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할머니의 상태를 감정한 이종식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의사는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불가항력인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의학적으로 소생 가망성이 없는 환자에게 과도한 의료행위는 무의미하다. 의료 자원 낭비는 물론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고통을 주는 것이다. 수분이나 영양 공급도 치료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캐나다에서는 의미 없다고 판단되면 중단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관련법이 없어 그런 의료 행위를 중단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일반인들은 존엄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난 10월 국립암센터가 성인 남녀 1천여 명을 대상으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국민 의식 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87.5%가 존엄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 등 생명 연장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기암 환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환자의 85%와 가족의 94%가 중환자실 입원과 심폐소생술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존엄사 관련 법률이나 기준이 없어 환자와 의료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존엄사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물론 인명(人命)과 관련된 법인 만큼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나오고 있다.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 가운데는 미국 오리건 주의 사례가 흔히 거론된다. 이 법은 의사가 소생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독극물을 처방해주고, 환자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사실상 안락사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존엄사를 인정하되 의사나 가족들의 극단적인 대처를 막기 위한 안전 장치를 미리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데는 전문가들도 같은 생각이다. 

박재현 경희대 의대 의료윤리학과 교수는 “존엄사를 반대하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 오리건 주의 존엄사법처럼 존엄사와 안락사 구분이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안전 장치를 만든 후에 존엄사법을 시행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통증조절법안(Pain Relief Act)을 먼저 시행한 뒤 안락사법이나 존엄사법을 만들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존엄사·안락사 구분 명확히 하는 안전 장치부터 만들어야

전문가들이 꼽는 안전 장치를 종합하면 크게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우선 ‘완화 의료’의 활성화이다. 완화 의료는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연명 치료 대신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호스피스(hospice)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2006년 6만6천여 명의 암 사망자 중 불과 7.5%인 5천여 명만이 호스피스 기관에서 숨진 것으로 나타날 만큼 호스피스 기관 이용률은 저조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호스피스 기관도 78개소 5백24병상으로 선진국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덕형 보건복지가족부 질병정책관은 “말기 암환자 및 가족의  신체적·정신적·경제적 고통을 최소화함으로써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자 한다. 관련 법률과 보험급여 기준을 마련하고, 완화 의료 시설과 인력을 확충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두 번째 안전 장치는 사전의사결정제도와 법정대리인(POA: Power of Attorney)제도의 도입이다. 외국의 경우 환자가 평소 작성해둔 생전 유언(living will)에 따라 의료 행위가 결정된다. 생전 유언에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영양 공급, 혈관 주사, 항생제 투여 여부 등을 명시해둔다. 또, 법정대리인을 지정해 환자가 의식불명이나 의학적으로 사망한 경우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하도록 한다.

윤영호 국립암센터 기획조정실장은 “사전의사결정제도나 법정대리인제도는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막고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예방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환자가 의학적으로 소생할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맡기는 제도가 필요하다. 의사·종교인·법률인 등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가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고 이후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경희대 의대 의료윤리학과의 박교수는 “의료 윤리는 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자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의학적 또는 법률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거의 뇌사 상태’라는 말은 듣기에 따라 뇌사 상태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잘 살자는 뜻의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있듯이 웰엔딩(well-ending)이라는 말도 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를 의미한다.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권리에 죽음을 품위 있게 맞이할 권리도 포함시켜야 할지를 놓고 의료계, 정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완화 의료 제도, 외국에서는…

미국

 1968년 호스피스 제도화 논의.
 1976년 캘리포니아 주, 자연사법(Natural Death Act) 제정 및 생전 유언(living will) 법제화.
 1981년 호스피스 관련법 제정.
 1982년 말기환자를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호스피스 도입.
 현재 미국 전역에서 생전 유언에 따른 존엄사 인정. 생전 유언에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영양공급, 혈관주사, 항생제 투여 여부 명시. 임종시 환자를 대신할 대리인(POA) 지정.
 
타이완

 1990년 대만호스피스재단(Hospice Foundation of Taiwan) 설립.
 1995년 말기환자 대상으로 호스피스 활성화. 
 2001년 호스피스법 시행규칙 제정.
 2002년 호스피스 의료기관 20개소 2백59병상.
 2000년 자연사법(Natural Death Act) 제정. 말기 환자에게 생전 유언 카드(living will card) 작성 유도.
 
일본

 1981년 호스피스 제도화
 1990년 말기 환자, 에이즈 환자 대상으로 호스피스 활성화 및 보험 적용.
 현재 호스피스 의료 기관 1백63개소 3천1백5병상. 호스피스 및 완화의료 수혜자, 연간 1만7천4백10명. 방문호스피스 서비스 제공. 

 영국

  1991년 호스피스 국가위원회 설립.  
 현재 독립시설형 2백20개소, 방문호스피스 3백84팀, 병동형 2백50여 개 등 총 3천5백 병상 운영. 전액 국가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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