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에서 내공 쌓으며 ‘과외’ 공부도 한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8.11.2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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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표, 조용한 행보 속 언론 접촉 늘리고 잦은 지방 방문 ‘눈길’

▲ 내년까지는 조용한 행보를 보이겠다는 박근혜 전 대표가 11월21일 있었던 부경대 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행보를 놓고 당 안팎에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누구는 박 전 대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친이명박계 인사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박 전 대표를 바라보고, 친박근혜계 인사들은 웬 호들갑을 떠느냐며 마뜩찮은 표정이다. 이런저런 말이 무성하지만 분명한 것은 박 전 대표의 행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박근혜’가 주목된 것은 11월17일 매일경제신문·한국경제신문·서울경제신문 등 일간 경제신문 기자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 내용이 알려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다음 날, 박 전 대표가 “최고로 잘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지난 정부의 인사라도 쓸 수 있어야 한다”라며 이른바 ‘탕평 인사’를 주장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날 자리는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마련된 자리였다. 박 전 대표측에서는 오찬이 끝난 뒤 혹시나 하는 걱정에 자리가 끝난 이후에도 보좌관이 다시 한 번 ‘비보도’라는 것을 기자들에게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경제신문이 치고 나가고 연합뉴스가 따라 보도하면서 거의 모든 언론에 이날 모임 내용이 보도되었다. 매일경제신문과 서울경제신문은 애초의 비보도 약속을 지켜 보도하지 않았다. 한 경제신문 기자는 “보도가 나간 뒤 박 전 대표가 매우 화를 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앞으로 경제신문 기자들을 합동으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들었다”라고 전했다.

비보도 전제했던 ‘탕평 인사’ 발언 보도에 대노

박 전 대표는 이날 작심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여러 정황을 볼 때 그녀가 이날 언론에 보도될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이런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보도’를 여러 차례 강조한 데다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이후 평소 신중한 언행을 보여왔고, 측근들도 “2009년까지는 조용히 행보할 것이다”라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이날 발언은 평소 그녀가 심중에 담아놓았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박 전 대표는 현 상황이 엄중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경제 위기 속에서 ‘탕평 인사’를 말한 것은 미국 오바마 당선인이 대선 후보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에 기용하려고 한다는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안다. 오바마와 달리 이명박 대통령측 사람들은 아직 진정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권 초 형성되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 간 냉기류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지난 10월 말 이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과 박근혜계의 좌장인 김무성 의원이 만난 것을 들어 두 진영이 화해로 가는 것 아니냐고 관측하기도 한다. 이의원은 지난 총선 이후 김의원과 의원회관 복도 등에서 여러 차례 우연히 부닥쳤다. 김의원 방이 의원회관 420호이고, 이의원 방이 의원회관 419호로 이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의원은 아무 말 없이 손만 내밀었다. 어떤 때는 지나가던 이의원이 김의원이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들어와 악수하고 나간 적도 있다. 하지만 “밥 한 번 하자”라는 얘기 등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밥을 먹었으니 변화가 일어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화해 무드’로 보는 것은 섣부르다. 이는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만난 시간이 한 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게다가 국정감사 기간이라고는 하나 만남 자체가 급박하게 이루어졌다. 이의원은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할 것이다. 잘해보자”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김의원은 주로 들었다. 이의원은 또 지난 총선 때 김의원 등 ‘친박근혜 인사’들이 낙천되었던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김의원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내용 있는 만남이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김의원측에서는 “상대방이 진정성이 없는데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겠느냐”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11월19일 경남 창원을 방문했다. 경남이주민사회센터를 방문하고 주남저수지와 우포늪을 찾았다. 경남 지역의 대표적인 친박근혜 인사로 통하는 김학송 국회 국방위원장이 여러 차례 와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김무성 의원과 지역구 의원인 조해진 의원 등이 수행했다. 11일 충북 제천시 종합보건복지센터 개관식에 참석한 이후 1주일만이다. 21일에는 부산 부경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뒤 지지 조직인 ‘포럼 부산 비전’ 창립 2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포럼 부산 비전’ 대표인 이재호 변호사는 “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해서 회원이 8백명 정도이다. 21일 행사에는 일반인들도 많이 참석할 것 같다. 박 전 대표는 기념식이 끝난 뒤 ‘포럼 부산 비전’ 간부들과 만찬을 한 뒤 서울로 간다”라고 말했다.

“경부 벨트 복원 작업 아니냐” 추측도

박 전 대표의 이런 행보는 이른바 ‘경부 벨트’의 복원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영남-충북-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경부 벨트는 한나라당이 선거 때마다 추구했던 필승 구도였다. 박 전 대표는 어머니인 고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었던 충북, 자신의 지역구가 있는 대구·경북, 지난 총선을 기점으로 ‘친박근혜’ 세력이 강세를 보인 부산·경남을 아우르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이명박계’에 맞서 영남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눈길을 끈다.

한나라당의 한 소식통은 “박 전 대표와 가까운 인사들이 최근 부쩍 언론에 신경을 쓰는 것도 과거에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지난 경선 때 언론의 지원을 업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인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서도 친분을 쌓기 위해서 기자들을 삼삼오오 모아 밥을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무성·현기환·이혜훈 의원 등이 최근 기자들을 만났다.

박 전 대표 스스로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한 측근 의원은 “기본적으로는 진중하게 간다는 것이지만 만나자는 사람들을 다 거절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만나기만 하면 다 친박근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처음 국회의원이 되어 서로를 잘 알지 못하니 호기심 차원에서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국회의원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벌써부터 (박 전 대표에게) 연말 모임에 와달라는 요청이 많은데 고민이다. 어디는 가고 어디는 안 갈 수도 없고…”라며 만나자는 요청이 많아졌다는 것을 시사했다. 한 친박 의원은 “친이명박계로 알려진 의원이 ‘밥이나 사달라’고 하는데 오해가 있을까 봐 미루고 있다. 그는 계파를 떠나 정치 선배들로부터 배우겠다는 입장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2주마다 한 번씩 학자들로부터 ‘과외’도 받고 있다.

‘물밑에서 분주하게 조직을 다지고 내공을 쌓는’ 박 전 대표의 이런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듯한 공개적인 언급이나 행보는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년 초 개각이 현실화하고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재오 전 의원이 귀국한다면 갈등이 재연되면서 다시 전면에 나서는 상황이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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