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물 붓는’ 악몽의 나날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11.25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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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빚·사채에 몰려 신용회복위원회 찾은 사람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 신용 위기에 내몰린 서민들은 고금리 사채시장에 손을 내밀기도 한다. ⓒ시사저널 박은숙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서민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중소기업의 도산이 이어지고 자영업자들은 가게 문을 닫고 있다. 영업을 할수록 오히려 빚만 늘어가는 실정이다. 주가 폭락으로 주식 투자자들도 빚더미에 앉았다. 신용 위기에 몰린 서민들은 고금리 사채시장에 손을 내밀고 결국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서울 명동의 신용회복위원회는 매일 신용 문제를 상담하러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난 11월19일 오후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신용불량자가 된 부인을 위해 남편이 동행했는가 하면, 신용 카드빚을 감당하지 못해 위원회를 찾은 여대생도 있었다.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식당을 차렸다가 엄청난 빚을 진 50대 자영업자는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상담 건수는 25만1천9백48건이었으나, 올해는 9월 말까지 31만8천2백7건으로 전년도의 상담 실적을 훨씬 초과했다. 하루 평균 1천명 이상이 상담을 받고 있는 셈이다.

신용회복위원회 김상길 선임조사역은 “지난 2006년에 비해 지난해에는 상담 건수가 줄었다가 올해 경기 침체 영향 등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최근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 상담을 받은 서민들은 한결같이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고 있었다. 그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기까지 어떤 풍파를 겪어야 했는지 들어보았다.

■ 카드빚 돌려막다 지친 허정숙(가명)씨 (38세, 여자, 주부, 인천 동구)

허정숙씨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넓은 집과 넉넉한 수입으로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한발 앞서갔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 겹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트레일러 차주였던 허씨의 남편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 값 때문에 운전대 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허씨 부부는 첫아이를 낳은 후 차를 팔고 식당을 차렸다. 하지만 찾는 손님들이 없어 공치는 날이 많았다.

매달 나가는 가게 세를 내기도 벅찰 정도였다. 이러는 사이 카드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는 수 없이 허씨 부부는 가게를 정리하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연이은 실패로 허씨 부부는 전 재산을 잃었다. 남은 것은 카드빚과 지인들에게 빌린 빚뿐이었다.

허씨 남편은 재기를 꿈꾸며 자동차 유리 가게에 가까스로 취직했다. 마땅한 기술이 없어 박봉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면 직접 창업을 할 생각이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허씨도 취직을 했지만 남편 월급을 합쳐 월 2백만원이 안 되었다.

그나마 둘째아이를 임신한 이후에는 직장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카드를 돌려막다가 한계 상황에 부닥쳤고, 결국 부부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으나 대출이 안 되었다. 급여 압류의 두려움으로 통장 개설은 엄두도 못 냈다. 허씨 남편은 4대 보험에도 제대로 가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수입은 허씨 남편의 월급이 전부였다. 그것마저 없으면 아들과 구걸이라도 해야만 했다. 신용불량자인 허씨 부부에게 대출을 해줄 곳은 사채업체밖에 없었다. 허씨 남편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다. 유리 공장에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친구들을 대신해 운전을 해주었고, 대리 운전까지 했다. 하지만 빚을 청산하기는커녕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든 삶을 살고 있다.

▲ 최근 서울 명동의 신용회복위원회에는 서민들의 상담 건수가 또다시 늘어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 사채 빌려 사채 갚는 김상천(가명)씨 (40세, 남자, 회사원, 경기도 김포시)
 

김상천씨는 지난 1997년 12월에 첫 취직을 했다. 넉넉한 월급은 아니었지만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조금씩 적금을 부어가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결혼도 했다.

김씨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주식에 손을 대면서부터이다. 김씨가 다니는 회사에 주식 바람이 불었고, 거기에 휩쓸렸다. 김씨는 은행에서 5백만원을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했다. 주가가 계속 오르면서 처음에는 쏠쏠한 재미도 보았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주가가 조금씩 내려가더니 이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주식에 대한 지식 없이 ‘묻지마 투자’를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에 투자했던 원금은 거의 바닥났고, 그 원금이 생각나서 은행에서 대출받아 주식에 다시 투자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주식 투자에 신경쓰다 보니 정신과 육체는 피폐해져갔다. 그렇게 주식을 시작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5천여 만원을 날렸다.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과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 카드론 등 빚만 잔뜩 졌다. 김씨의 빚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형이 부업으로 자판기 사업을 해보자며 제안했고, 김씨는 여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투자 금액이었다. 주식 투자로 거의 전 재산을 날리고 빚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제2 금융권에서 어렵게 대출을 받았다.

그러나 자판기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 등에 자판기를 설치했지만 6개월 만에 알거지가 되었다. 영업이익은커녕 자판기를 구입한 대금도 회수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자판기를 헐값에 처분한 후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이번에는 5년 전에 사업을 하던 형의 대출 보증을 서 주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형의 사업이 부도 위기에 처하자 은행에서는 보증인인 김씨에게 대출금 채권 추심을 시작했다. 형의 빚 보증 2천만원을 포함해 김씨가 진 빚은 1억원에 육박했다. 은행과 캐피탈 그리고 카드회사로부터 대출금 상환 압박이 시작되었다. 대출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부동산과 동산, 심지어 급여까지 압류하겠다는 서류가 날아들었다.

김씨는 채권 추심이 가장 심한 카드빚을 청산하기 위해 전세금 4천만원을 빼서 월세로 옮기고 3천만원을 상환했다. 하지만 김씨에게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가 모시고 살던 모친의 치매가 심해져 요양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리저리 수소문 한 끝에 보증금 5백만원에 월세 80만원짜리 요양원을 찾았다. 한숨을 돌렸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김씨의 장모가 직장암에 걸려 수술비를 부담해야 했다. 김씨가 돈을 빌리기 위해 손을 벌린 곳은 사채업자였다. 살인적인 이자와 수수료를 감수하면서 사채를 빌렸다.

매월 돌아오는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는데 금세 한계가 드러났다. 사채업자의 협박이 이어졌고, 김씨는 사채를 갚기 위해 사채를 빌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생과 사의 문턱을 오갔다고 한다.

■ ‘잘나가던’ 사업가 박경태(가명)씨 (43세, 남자, 사업, 서울 관악구)

천당과 지옥은 한 순간이었다. 박경태씨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을 겪었다. 박씨는 한때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서 성공했고, 좋은 집, 좋은 차, 행복한 결혼 생활,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박씨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모친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이다. 응급 처치가 늦는 바람에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리고 경기 불황이 닥치면서 잘 되던 박씨의 사업도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사업 자금은 고갈되어갔다. 하는 수 없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집값이 떨어져서 헐값에 팔았다. 지난 10년간 모았던 돈이 6개월 만에 모두 날아갔다. 박씨 손에 남은 것은 고작 5백만원뿐이었다. 갚아야 할 빚은 산더미였다. 박씨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에 백수 신세로 전락했다.

박씨의 아내는 가계에 보탬이 되겠다면서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카드 값, 전기세, 가스비, 전화비 등의 청구서에는 빨간 경고장이 붙어 날아왔다. 박씨는 현금서비스로 돌려막기를 시작했고, 부인 명의의 카드와 대출까지 총동원해 빚을 갚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인의 소개로 택배회사 배달원으로 취직해 6개월 정도를 버텼으나 결국 사고가 터졌다. 하루에도 12번씩 밀려오는 카드회사와 대출업체들의 협박 전화, 빌고 또 빌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니던 택배회사도 노사 분쟁이 터져 문을 닫아버리고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박씨와 박씨 부인에게는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붙어다니고 있다.

■ 모친에게 명의 도용당한 최지희(가명)씨(27세, 여자, 대학생, 서울 성북구)

최지희씨는 올해 스물일곱 살로 서울 소재 명문 여대에 다니고 있다. 최씨는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최씨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회사가 공중 분해되면서 사업을 시작했고, 승승가도를 달렸다. 강남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요지에 부동산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진한 아버지를 지옥으로 몰아세운 것은 철썩 같이 믿었던 부하 직원과 욕심 많은 사촌이었다. 최씨 아버지는 사촌에게 사기를 당하고 사업도 엉망이 되어갔다. 급기야 부도 낸 책임을 지고 구치소에 1년 반이나 수감되어야 했다. 최씨 아버지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집안은 쑥밭이 되었다.

최씨 어머니는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었는데도 씀씀이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증권 투자와 사업을 하겠다며 집에 있는 돈은 죄다 끌어모았다. 이것도 부족해서 친인척, 친구, 지인들에게 돈을 빌렸고, 1년도 안 되어 모두 날리고 말았다.

급기야 당시 재수생이던 최씨 명의로 카드까지 발급받았다. 최씨의 진짜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씨 어머니는 딸의 명의로 여기저기서 카드를 만들었다. 이렇게 생긴 카드가 어림잡아 일곱 장은 되었다고 한다. 최씨는 자신이 신용불량자가 될 때까지 자신의 명의로 된 카드가 몇 장인지, 채무가 얼마인지도 몰랐다. 최씨 어머니가 끝까지 함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최씨 어머니는 카드 돌려막기와 현금 서비스를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나중에는 한계점에 도달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카드가 발급된 지 3년이 지나자 서서히 채무 상환 독촉이 시작되었다. 지옥같은 하루의 연속이었다. 최씨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채무 상환을 독촉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그곳에도 사람들이 찾아와 “차라리 몸이라도 팔아라”라며 협박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미니홈피에 수차례 글을 남겨 놓는 일도 있었다. 더 이상 탈출구가 없자 신용회복위원회를 찾고 도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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