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신용’에 발등 찍히니…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12.0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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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신용평가사들, 시장 평가와 다른 등급 내놓는 경우 많아…신뢰성 회복 위해 더 노력해야


최근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Fitch Ratings)가 우리나라의 신용등급 전망(Outlook)을 부정적(negative)으로 바꾸자, 국내 신용평가사가 피치의 평가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국가에 대한 신용등급을 발표하지 않는 국내 신용평가사의 입장에서 외국 신용평가사의 국가 신용등급에 대한 비판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국내 신용평가사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의 평가 논리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을 내지 않는 관행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국제적인 신용평가 기관들의 신용 상태나 공정성 문제가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2년 일본의 국채에 대해 이들 기관이 신용등급을 내리자 일본 재무성이 3대 신용평가사에게 그 근거를 제시하라고 질의서를 보낸 적이 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는 3대 신용평가 기관의 신용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벌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이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관대하고 이머징 국가에 대해서는 유독 엄격한 기준을 적용시킨다고 해서 논란을 빚어왔다.

3대 신용평가사에 대한 우리 시장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국내 3개 신용평가사 중, 두 개사의 대주주는 이미 글로벌 신용평가사로 바뀌었다. 한국신용평가(KIS)의 대주주는 무디스(Moody’s Investors Service)이고, 피치는 한국기업평가(KR)의 대주주가 되었다. 한신정평가(NICE)만이 아직 국내 은행들로 주주가 구성되어 있다. 피치에 대한 공식적인 반박을 한신정평가만이 했다는 사실은 이런 구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공공재’ 성격의 평가 정보를 만드는 주체가 ‘사익’에 관련돼

신용평가사는 말 그대로 신용을 평가한다. 믿을 만한가를 살펴본다는 이야기이다. 그 대상은 국가가 될 수도 있고 개인이 될 수도 있다. 개인들이 금융 기관의 차입금이나 이자를 갚지 못하면 개인 신용 점수가 내려간다. 신용평가 형태 중의 하나이다. 거래 상대방의 신용평가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이다. 거래를 하는 데 상대방의 신용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는 일은 무척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 그런 일을 대신해준다면 사회적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예를 들어 내가 5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면, 5개 은행은 나의 신용도를 개별적으로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5번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나 나의 신용도를 누군가가 대신 평가해주고 그 정보를 사용한다면 단 한 번의 평가 정보를 5개 은행이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소요되는 비용은 5분의 1로 감소한다. 그래서 신용평가에는 ‘공공재’의 성격이 있다.

그런데 신용평가라는 아주 중요한 공공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그 비용을 국가가 지불한다면 국가의 의도에 의해 신용평가 결과가 좌우될 수 있다. 공공재의 성격이면서 그 중요성도 크기 때문에 누군가가 비용을 지불하되 지불하는 주체의 의도가 평가 자체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등급을 받는 사람이 돈을 내는데도 그 등급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주고받는 거래의 속성과 거리가 있다. 여기에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모두 공모를 통해 기업 공개를 했다. 주식회사의 목적인 주주 이익의 극대화도 추구해야 한다는 의무가 부가된 것이다.

신용평가사는 평가 자체의 신뢰에 흠이 가면 생명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용평가를 후하게 받고 싶어하는 기업들, 신용평가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싶은 주주들, 좀더 정확한 신용평가를 요구하는 투자자들이 신용평가의 산출물인 신용등급을 두고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금번 글로벌 위기의 주연은 바로 글로벌 투자 은행(IB)들이었고, 조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다. 엄청나게 큰 시장을 형성했던 구조화 채권들에 대해서 과거 데이터(거의 신용에 문제가 없었던 시기에 기반을 둔)를 이용한 수학적 기법을 통해 투자자들을 현혹시켰다. 지금은 쓰레기로 전락해 버린 수많은 구조화채권(CDO)들이 모두 다 ‘트리플 에이(AAA)’라는 미국 국가와 동일한 신용등급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리먼브러더스는 파산을 하던 시점에도 우리나라와 같은 등급인 A2를 유지하고 있었고, 파산 2개월 전까지도 우리나라보다 높은 등급인 A1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고 있는 펀드들이, 투자 종목이 파산할 가능성은 우리나라가 국가 부도 위험에 처할 가능성보다 작다고 광고하는 것은 실은 거짓이 아닌 것이다. 신용평가 기관의 논리에 따르면. 한심한 노릇이다. 2개월 후에 파산할 IB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는 수준의 신용평가 기관에게 묻고 싶다. 누가 누구를 평가하겠다는 것인지.

건설업계에서 최고 신용등급 받은 업체도 악성 루머에 시달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와 1999년 대우그룹 해체, 2001년 현대그룹 분리, 2003년 SK글로벌 및 카드채 사태 이후에는 신용 시장에 커다란 이슈가 없었다. 또한 은행의 자산 확대 경쟁으로 신용평가사들의 주력 시장이었던 무보증 공모 회사채 시장의 규모가 축소되어왔다. 결국 시장이 수요자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기업들은 등급을 좀더 후하게 주는 평가사를 선호했고, 평가사의 논리는 매출 하락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는 구조화채권 시장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 현재의 위기를 더욱 확대시켰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비슷한 것으로 건설업체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 거론되고 있다. 건설 PF는 부동산 개발에서 발생되는 커다란 이익으로 금융 기관들이 너도나도 취급하고자 했던 상품이다. 물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집값으로 전이되고 일반 국민이 치르게 된다. 금융 기관의 처지장에서는 선취수수료를 받고 이자도 미리 계산해서 대출을 해주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뒤늦게 은행들이 독점한 시장에 뛰어든 증권회사들은 PF를 자산담보부증권(ABS)이나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과 같은 구조화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다 내다 팔았다. 그 과정에서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은 필수적이었다. 대부분이 투자 적격 등급이었던 것이 부동산시장이 얼어붙자 투자 적격 등급의 하단인 BBB-급 ABCP는 유통 시장이 없어져 버렸다. 건설업체에서 가장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받고 있는 G사나 D사 등도 시장에서 악성 루머에 시달려야만 했다. 시장의 평가가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보다 앞서가는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발생한 것이다.

이제 부동산 관련 증권이나 기업이 어떤 신용등급을 받았는가는 더 이상 시장의 관심이 아니다. 누가 먼저 퇴출될 것인가를 묻기 위해, 평가 대상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신용평가사의 등급 정보는 유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건설업계의 부도를 중심으로 신용평가사의 위기는 시작되고 있다. 신용평가의 생명은 신뢰성이다.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평가사 자체의 노력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평가받는 기업으로부터 받는 몇 푼의 수수료가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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