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예산 ‘볼모’…법 어기는 국회, 이대로 안 된다
  • 이현우 (서강대 교수·정치학) ()
  • 승인 2008.12.09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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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안 의결 법정 시한 넘기고 계속 파행 중…국정 운영에 지장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은 설득력 없어

▲ 이현우 (서강대 교수·정치학)

대한민국 헌법 제54조 2항에 따르면 정부는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까지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른 법도 아니고 한국의 최고법인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올해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국회는 12월2일인 시한을 넘겨버렸다. 더욱이 지금의 국회 상황은 언제 예산안이 통과될지도 모르는 안개 정국이다. 어쩌면 영민한 국회의원들은 헌법 제54조 3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바,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할 때에는 준예산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조항을 든든히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82일이나 늦게 개원하고 2천건이 넘는 법안들이 계류되어 있는 18대 국회 현황을 볼 때 예산안이 제때 통과되는 것을 기대한 것이 애초부터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을 수도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여당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수년간 12월 말에 예산안을 통과시켰어도 국정 운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국민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리고 보니 지난 10년간 단 한 번을 제외하곤 법정 시한에 맞춰 예산안을 통과시킨 적이 없었다. 심지어 2000년 이후 제때 통과된 2002년을 제외하고 모든 예산안은 정기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연말의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당장 국가 경제가 위기인 상황에서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들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당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회는 예산 집행이 예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정에 맞춰 예산 심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의견이다. 법을 비롯한 사회 규칙을 정했다는 것은 그것에 따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며, 규칙의 신뢰를 약화시켜 향후에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대비해야 하는 잠재 비용까지 지불하게 한다.   

행정부 감사·견제하는 일에는 정당 떠나서 ‘의회 소속’이어야

이러한 규범적인 비판을 넘어서 국회에서 예산 심의가 정당들 사이의 정쟁 도구로 전락되어 가는 현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매우 우려해야 할 점이다. 예산 심의가 지금처럼 파행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국회 기능과 관련된 것이다. 대통령제에서 의회의 기능은 크게 입법, 행정부 견제 그리고 국민 대표 기능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가장 고유한 권한이라면 입법 기능이겠지만, 행정부가 비대해진 현대 국가에서는 사실상 입법 기능의 상당 부분이 행정부로 넘어갔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정 입법이 전체 입법의 절반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이전보다 권한이 커진 행정부를 감시하는 국회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권한이 바로 예산 심의이다. 따라서 예산안을 심의할 때에는 국회의원들이 소속 정당을 떠나서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의회 소속이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 수준이 높다는 미국에서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정부가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여론이 70%가 훨씬 넘는다. 그만큼 의회가 행정부를 엄격하게 통제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실제적으로 예산 심의와 국정감사를 제외한다면 국회가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국회는 몇몇 법안 처리 문제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면서 예산안 심의를 볼모로 잡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과 예산안 심의는 여야의 합의를 당연한 원칙으로 하고 있다. 선거법은 정당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개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고, 예산 심의는 그만큼 국회의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에 다수결보다는 만장일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같은 전통으로 인해 이전에 야당은 예산안 심의를 조건으로 여당이 다른 사안에 대해 양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야당이 수적 열세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비록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라 해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당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과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수단은 국민 여론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국회 내 정당별 의석 비율을 뛰어넘어 여당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 따라서 권위주의 시대처럼 야당이 여당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보루로 예산 심의를 거부하는 것이 이제는 그리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헌법의 규정마저 지키지 않는 국회이지만 그래도 이참에 예산 심의에 대한 제도적 보완을 추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국회가 재정 정책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예산의 전 과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현재와 같이 예산과 결산에 대한 심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 대해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에 대한 국회의 수정 비율은 -0.12%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부 예산안의 타당성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국회의 예산안 심의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예산 심의 기간 확대, 예결의원회 상설화 등 제도 보완 필요

▲ 새해 예산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12월2일 열린 국회 예결특위의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조정 소위원회가 민주당 의원들의 불참 속에 진행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따라서 우선 예산 심의 기간을 현행 60일보다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는 미국 2백40일, 영국 1백20일, 독일 1백20일 등의 심의 기간과 비교해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둘째로 현재 특별위원회인 예산결산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바꿔야 한다. 2004년 이후 예결위의 실제 예산 심의 평균 일수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결위는 특별위원회이므로 겸직이 가능하고 1년 임기인 의원들의 교체율은 80%에 이른다. 이처럼 의원들의 낮은 전문성과 단기간의 예산 심의는 당연히 부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결위원회의 상설화를 통해 예·결산에 대한 국회의 연중 심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회의 예산 심의가 늦어지는 것이 심의 과정에서 이견으로 인해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면 반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 현재 정당들의 행태는 당리당략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산 심의에서는 국회의 대척점이 행정부여야 하는데, 정당들이 같은 편에 서야 할 상대 정당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 기능 강화를 위해서는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제도적 개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회가 스스로 기능을 약화시키는 행태를 지속한다면 결국은 더 많은 권한이 행정부로 쏠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행정부가 과도한 자의성을 갖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국민의 피해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국회 내 정당들이 본래 기능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이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따름이다. 18대 국회가 내세운 ‘정책 국회’ ‘소통 국회’ ‘상생 국회’는 단지 허울에 그치고 마는 것인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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