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에 ‘파생상품 폭탄’ 터진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12.1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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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경제연구소 보고서에서 위험성 지적…금감원 등 투자자 보호 위해 대책 마련 고심

▲ 11월1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KIKO 피해 대책 관련 금융 파생상품 관리 및 정책 과제에 관한 공청회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은행권이 또다시 구조 조정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 것 같다. 은행별로 회망퇴직제를 실시하거나 인력 슬림화 또는 지점 통폐합 등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특단의 조치들을 쏟아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빅뱅’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향후 곳곳에서 드러날 부실을 효율적으로 털어내기 위해서는 인수·합병(M&A) 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전광우 금융위원회 위원장도 최근 “필요할 경우 은행 간 짝짓기도 가능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시중 은행들이 외화 표시 파생상품 거래에서 거액의 손실을 입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엎친 데 덮친 격의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지난 12월2일자로 발행된 ‘국내 은행들의 외화 표시 파생상품 거래 실태’ 보고서에서 “지난 9월과 10월의 파생상품 거래 수지가 각각 28억 달러와 39억 달러로 적자 폭이 확대되고 있다. 시중 은행도 외화 표시 파생상품 거래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라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와 관련해 연구소측은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도 한사코 고사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 그대로이다. 금감원 발표 자료를 포함한 여러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라고 밝혔다.

파생상품 거래 잔액, 총 자산의 7배 넘는 은행도 있어

보고서에 거론된 시중 은행들은 현재 당혹해하면서도 “우리 은행은 파생상품 손실이 없다”라고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10월과 11월의 파생상품 손실 규모는 아직 집계 중이다. 현재로서는 마땅한 자료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고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은행권의 구조 조정 움직임과 맞물려 파장이 예상된다. 정부도 그동안 파생상품 시장 확대의 당위성을 강조해온 터라 관리·감독 소홀에 따른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될 것 같다.

파생상품 논란과 관련해 주목되는 부분은 시중 은행들의 파생상품 거래 잔액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시중 은행의 파생상품 거래 잔액(계약 가격 기준)은 지난 2007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8년 6월 현재는 2천6백5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문제는 총 자산에 비해 파생상품 거래 잔액 비중이 기형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특히 SC제일은행과 시티은행의 경우 총 자산 대비 파생상품 거래 잔액이 무려 7.06배와 5.11배에 달했다. 나머지 시중 은행이나 산업은행 등 특수 은행 역시 거래 잔액 비중이 많게는 두 배 가까이 되었다.

보고서는 “국내 은행의 경우 주가선물이나 주가옵션과 같은 투기 거래를 하지 않는다. 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은행권 파생상품 거래의 대부분은 외화 관련 거래로 추정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9월과 10월 파생상품 거래 수지가 각각 28억 달러와 39억 달러로 적자 폭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우려를 부추기고 있다. 이런 추세는 11월 이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추정된다. 파생상품 거래 수지의 적자 폭 확대는 어떤 형태로든 은행의 대규모 손실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김광수연구소측의 시각이다. 

보고서는 “파생상품 거래 자체는 장부외 거래이기 때문에 당장은 재무제표 상에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금융 기관 파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갈수록 대규모 손실 여부가 드러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어 “금융 당국이 발표한 통계를 전제로 우선 외국계 시중 은행인 SC제일은행과 시티은행에 대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금융 당국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국내 은행들의 파생상품 거래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파생상품 거래 잔액과 실제 거래된 대금은 엄연히 다르다. 헤지를 목적으로 하는 파생상품 특성상 은행들은 일정액의 프리미엄(수수료)만 받고 상품을 판매한다. 실제 거래 가격은 상품 가격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총 자산 대비 거래 잔액 비중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일부 은행은 보고서 내용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 시중 은행의 관계자는 “은행마다 파생상품의 헤지 비율이 다르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손실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파생상품 거래 내역을 공개하라는 것은 기업의 기밀을 오픈하라는 것과 같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금융 전문가들은 김광수연구소의 지적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파생상품 거래 수지의 적자 폭 확대는 결국 은행이든, 기업이든, 심지어 개인이든 간에 누군가는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전정용 한국금융리스크관리전문가협회 사무국장은 “금융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금융 위기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팔고 빠져나갔다. 그러나 보유 규모가 큰 일부 대형 은행들이 큰 규모의 파생상품을 갖고 있다가 손실을 키웠다”라고 말했다. 전사무국장은 이어 “은행의 경우 수수료만 받고 팔면 되기 때문에 피해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문제는 뒤늦게 ‘폭탄 돌리기’를 해서 생긴 피해자들이다. 이 폭탄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피해자들이 드러나는 만큼 지금이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시장 활성화 앞서 리스크 관리 시스템 구축해야

금융권 일각에서는 금융 당국의 안일한 자세가 문제를 키우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 기관 관계자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파생상품은 고객의 금융 자산을 담보로 2차나 3차 파생상품을 만들게 된다. 때문에 문제가 터지면 다단계식 금융 부실로 연결된다. 그러나 금융 당국은 그동안 파생상품 시장을 키우는 데만 급급했지 이런 부실화 과정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감독을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제도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파생상품 관련 제도는 그동안 꾸준히 보완했다. 제도만 보면 선진국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금융위원회와 함께 투자자 보호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다양한 대책을 강구 중이다”라고 밝혔다.

조광연 증권예탁결제원 차장은 “파생상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우선 효과적인 리스크 관리 시스템 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 향후 금융 전문 인력 확보와 함께 정부 차원의 거래 지원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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