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뺨치는‘공포 시대’ 열리나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12.30 02: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 반역죄 법안 확대해 누구든 기소 가능해질 듯

▲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푸틴 총리와 귀엣말을 나누고 있다. ⓒITAR-TASS

푸틴의 러시아가 스탈린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푸틴 정부는 최근 반역죄 범위를 확대해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고 외국인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법안을 의회에 올렸다. 이 법안은 외국 기자와 만나기만 해도 최장 20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독소 조항을 품고 있다. 외국인과 접촉하면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적’에 협조하게 된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행동에 대한 처벌 조항도 강화했다. 기존의 법은 국가 안보에 해롭다는 점을 입증해야 했지만 개정 법안에서는 그런 책임을 삭제했다. 그러니까 검찰이나 비밀경찰 KGB의 후신 FSB가 반역 혐의가 있다고 판단하면 누구든 기소할 수 있다.

새 법안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외국이나 비정부 기구(NGO)에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문제는 정보의 내용이나 범주에 관한 명문 규정이 없어 사법 당국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재량권이 무한하다는 데 있다. 하다못해 날씨 이야기도 정보로 해석하면 그만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많은 반체제 인사나 단체들이 푸틴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었다. 푸틴을 비판한 언론사가 폐쇄되고 반정부 기사를 쓴 기자가 의문사를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기존의 법에서도 반정부 활동을 거의 봉쇄당한 반정부 세력들은 새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경우 러시아는 스탈린 시대로 완전히 회귀할 것으로 우려한다. 심지어 스탈린보다 더 가혹한 푸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걱정한다.

외국인이나 NGO에 정보 제공 행위 금지시켜

▲ 한 여성이 스탈린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에 헌화하고 있다. ⓒAP연합

정부에 대한 비판을 모조리 반역죄로 처벌한 스탈린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유일한 희망은 이 법안이 러시아 하원 두마의 심의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수정되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두마의 안보위원회 부위원장 제나디 구드코프는 새 법안에 모호한 대목이 있어 오는 1월 심의 때 문제 조항을 손질하겠다고 말했으나 반체제 인사들은 이 발언을 의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푸틴과 그의 세력이 강력히 추진하는 이 법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정부 관리들은 갈수록 첨단화하는 현대 스파이 전쟁에서 기존 법으로는 안보 법망을 교묘히 피하는 범죄를 예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첩보 활동이 특히 NGO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NGO와 관련된 조항을 추가했다는 것이 관리들의 설명이다. 

정부가 NGO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푸틴은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를 붕괴시킨 이른바 ‘색깔 혁명(color revolution)’의 배후 세력이 바로 NGO라고 보고 있다. 이번 법안에는 통제를 강화하는 다른 법안들도 첨부되어 있다. 러시아 정부는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 권력을 강화하지 않고는 사회적 소요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 모든 움직임은 푸틴의 전략에서 나왔다. 2000년 대통령에 취임한 푸틴으로서는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KGB의 권한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일환으로 반역죄를 개정하기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제 인권 감시 기구의 모스크바 지부를 맡고 있는 레프 포노마료프는 비밀경찰이 이미 오래전에 실질적으로 정부를 장악했고, 이번 법 개정을 통해 합법적인 근거를 마련할 속셈이라고 말했다.

개정안은 반역죄 재판에서 배심 절차를 생략한 또 다른 법안의 발효를 앞둔 미묘한 시점에서 상정됨에 따라 더욱 우려를 자아낸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는 이 법안은 반역죄의 경우 배심 재판 없이 판사가 곧바로 선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판사들이 배심 평결 없이 어떤 판결을 할지는 뻔하다. 인권 단체들의 성명에 의하면 문제의 법안은 정보 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발의된 것이다. 정보 기관들은 그동안 현저한 법률 위반이 없어도 반체제 조직이나 인사를 단속하고 시민 대표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정치범을 투옥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왔다.

배심 평결 없이 판사가 판결하는 법안도 ‘서명’ 기다리는 중

새 법안을 둘러싼 찬반 논쟁에서 현행 반역죄법이 모호하다는 데는 쌍방이 같은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법의 보완 작업이 정보 기관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기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자 의외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새 법에서는 반체제는 물론이고 NGO, 기자, 학자들까지 위험에 노출되고 특히 과학자들이 수난을 겪게 되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최근 수년간 정보 당국에 의해 ‘스파이 마니아’로 간주되었다. 과학자들은 대체로 외국 동료들과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 이런 행위는 옛 소련 시절 엄격히 통제되다가 소련 붕괴 후 일부 완화되었다. 최근 여러 명의 과학자들을 변호했던 저명한 인권 변호사 안나 스타비츠카야는 “이제 과학자들은 서로 통신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푸틴 집권 이후 적어도 12명의 과학자가 정보 당국에 의해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들의 재판에서는 증거가 조작되고 담당 판사들이 압력을 받은 경우도 많다.

지난해 정보 기관을 당혹시키는 이례적 사건이 발생했다. 2명의 시베리아 출신 물리학자들이 FSB에 의해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기각 판결을 받았다. 학자들의 소속 대학에서 누설된 자료에 기밀 사항이 없다고 소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사건이 법 개정을 촉진했을지 모른다고 비판자들은 추측한다. 유럽인권재판에서 러시아 과학자들을 변호하는 인권 단체들은, 앞으로는 대학이 과학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길도 막힌 셈이라고 개탄했다.

반역죄 관련 법 개정과 더불어 푸틴의 장기 집권 길을 트는 작업도 속도를 내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헌법 개정안이 12월22일 상원을 통과했다. 이는 푸틴을 대통령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포석이다. 푸틴과 그의 하수인 격인 메드베데프는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푸틴은 8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세 번째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 때문에 지난봄 사임하고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추대한 다음 자신은 총리를 맡았다. 헌법 개정안이 하원인 두마에서도 통과되면 메드베데프는 빠르면 수개월 안에 사임하고 푸틴이 대통령에 복귀해 6년 임기를 시작한다. 

메드베데프는 취임 6개월 만인 지난 11월 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각본대로 만사가 진행된다면 그와 푸틴은 쌍두마차처럼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러시아에서는 국정 실패에 대한 책임은 주로 총리가 떠맡게 되어 있다. 푸틴 총리는 결국, 최근 금융 위기에 따른 비난을 모면하고 자신의 대통령직 복귀를 서두르기 위해 관련 법률의 개정을 밀어붙였다고 서방 분석가들은 말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에 의해 추진된 개혁개방 정책 덕분에 탄생한 러시아는 겨우 20년 만에 다시 소련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