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폭풍의 계절’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아라”
  • 이석·반도헌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09.01.06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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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조원 규모의 은행권 유동성 지원 펀드가 조성되면서 산업 전반에서 ‘옥석 가리 기’가 본격 펼쳐질 전망이다. 하지만 자칫 구조조정이라는 본래의 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어 앞?

새해 벽두부터 산업 현장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정책 방향이 가닥을 잡으면서 조만간 은행권을 중심으로 강도 높은 ‘옥석 가리기’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중 은행들은 이미 준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신한은행은 최근 여신 한도가 5백억원 미만인 거래 업체 7만여 곳을 대상으로 부채 및 유동성 비율, 리스크 관리 여부 등을 정밀 조사 중이다. 국민은행이나 우리은행도 기업 개선을 위한 본부를 별도로 신설하는 등 건설 및 조선·해양 업종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나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중 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맞추기에 급급하면서 자금을 풀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러나 정부가 최근 필요한 만큼의 공급을 약속한 상황이어서 살릴 기업에는 아낌없이 자금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동규 은행연합회장도 지난 12월26일 기자간담회에서 “연말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동안 중소기업의 자금 지원이 원활하지 못했다. 1월 이후에는 기대한 만큼 지원이 잘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라고 밝힌 바 있다. 유동성 지원으로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서려는 ‘복선’을 깐 셈이다.

연말까지 구조조정 위한 세부 절차 마무리

건설사 대주단 가입률도 최근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지난 12월26일 기준으로 38개 건설사가 현재 대주단 가입을 마쳤다. 그동안 정부 눈치를 보며 가입 신청을 미루던 것과는 비견되는 모습이다. 중소기업의 유동성 지원을 위해 마련한 패스트트랙(Fast-Track) 프로그램 역시 현재 1천100여 곳이 가입해 2조원 이상이 지원된 상태이다.

정부가 어느 정도까지 구조조정을 단행할지 현재로서는 예단하기 어렵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연말까지 업종별 신용 위험 평가 기준과 세부 절차를 마련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경영 상태가 건전한 기업의 회생은 돕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과감히 퇴출시킨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산업별로 혹은 기업별로 생사가 극명하게 갈릴 전망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20조원에 달하는 은행권 자금 확충 펀드를 조성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단일 지원 규모로는 최대 수준이다. 한국은행이 10조원을, 산업은행이 2조원을 각각 지원하고, 나머지 8조원은 일반 투자자들을 통해 끌어들일 예정이다. 이 조치를 발표하기 얼마 전에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구조조정 전담 기구인 기업재무개선지원단을 발족시키기로 했다.

우선 은행의 유동성 지원을 위해 조성하는 자금 확충 펀드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자금 지원을 통해 은행 내부의 인적 쇄신이나 구조조정 등 경영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위는 은행권 자본 확충 펀드가 공적자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임승태 사무처장은 “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성하는 방식인 만큼 펀드 지원용 자금은  공적자금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은행이 펀드의 지원을 받아도 정부가 과도하게 경영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은행연합회측도 “올해 말까지 필요한 은행이, 필요한 시기에 자율적으로 신청해 자본 확충을 지원받는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보완 장치(Back-up Facility)이지, 현재 은행 경영이 악화되어 정부가 긴급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 펀드의 성격을 공적자금과 비슷하게 보고 있다. 20조원의 펀드 중에서 12조원을 중앙 은행인 한은과 국책 은행인 산업은행이 출자한 데다, 향후 손실을 낼 경우 문책성 조치를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부 금융 전문가들은 펀드 자금 조성에 앞서 은행권 구조조정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IMF 외환위기를 야기한 은행들을 겨우 살려놨더니 방만한 경영과 리스크 관리 소홀로 다시 위기를 맞았다. 기업의 구조조정에 앞서 우선 은행들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 일부 업종에서는 대기업들도 유동성 위기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위는 지난해 10월 폐업한 시흥시 시화공단 내 공장. ⓒ연합뉴스

정부·채권단,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 ‘패스트 트랙’ 가동

여하튼 정부의 자금 확충 펀드 조성으로 은행권은 당분간 구조조정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경우에 따라 앞으로의 경영 실적에 따라 금융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된 셈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의 이번 조치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현재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정부가 자금을 수혈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박정현 한화증권 리서치본부 애널리스트는 “정부의 금융시장 안정 대책은 대부분 단기적 처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조치로 인해 환율 상승 폭이나 외국인 순매도 비율이 다소나마 둔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유동성 악화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우량 업체와 부실 업체의 분리, 우량 자산과 부실 자산의 분리 과정도 중요하다. 철저하게 냉정한 판단을 통해 기업 구조조정을 이끌어내야만 시장의 신뢰를 끌어낼 수 있다. 명확한 기준 없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가는 자칫 시장의 불만만 가중시켜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요컨대 정부와 채권단은 최근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인 ‘패스트 트랙’을 통해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기업의 신용을 A등급(정상 기업), B등급(일시적 경영난에 직면한 기업), C등급(부실 징후가 있으나 회생 가능한 기업), D등급(회생 불가 기업) 등 네 등급으로 나눠 살릴 회사는 살리고 그렇지 않은 곳은 시장 퇴출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책은 기업 구조조정보다는 경기 급락에 따른 중소기업의 유동성 부족을 해결해주려는 측면이 강하다. 일정 기준을 정해놓고 자격이 안 되는 곳은 과감히 퇴출시키려는 구조조정의 본래 취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기업 살려내기 위한 유동성 지원 되어선 곤란”

은행연합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12월26일 현재 패스트 트랙에 1천100여 개사가 가입했고, 2조614억원이 지원되었다. 그러나 퇴출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건설업체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대주단 협약’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건설사 대주단에 38개사가 가입을 신청했다. 이 중 37개사가 승인을 받았고 1개사는 현재 심사 중이다. 마찬가지로 퇴출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이병건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정부의 정책 목표가 기업 구조조정보다는 기업을 살려내기 위한 유동성 지원에 집중되어서는 곤란하다. 안일하게 대응했다가는 오히려 은행권의 부실을 더욱 키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은행권의 NPL(무수익 여신) 처리도 관건이다. 한화증권이 최근 내놓은 ‘2009년 은행 업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9월 말 기준으로 국내 금융권의 총 운용 자산은 1천1백9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24.6%인 3백48조원이 부실화할 위험에 놓여 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이 NPL 처리 방안이나 이에 따른 손실 분담에 대한 방법론조차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박정현 한화증권 애널리스트는 “건설업이나 키코 관련 중소기업 여신, 신생 조선업, SOHO에 대한 여신이 고스란히 부실화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주택시장의 침체가 심각해질 경우 상대적으로 안전 자산으로 분류되었던 주택담보대출의 손실율도 높아질 위험이 있다. 기업 구조조정과 함께 은행권의 NPL 문제에 대한 대책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몸집 커졌지만 속은 허약…책임론도 대두

구조조정, 은행도 예외는 아니다
 
 
▲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이 금감원 기자실에서 건설업 및 중소 조선업 구조조정 추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건설·조선업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의 광풍이 휘몰아칠 태세이지만 은행들은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짝 비켜서 있다. 오히려 정부를 대신해 은행들이 기업 구조조정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은행들이 구조조정 논란에서 자유로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은행들 역시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은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12%, 기본 자기자본비율 9% 수준을 요구하고 있지만 은행들의 BIS 비율은 지난해 9월 말 기준으로 10.86%, 기본 자기자본비율은 8.33%에 머무르고 있다. 정부가 20조원 규모의 은행 자본 확충 펀드를 조성하며 자금 지원에 나선 것도 위기에 놓인 은행들의 자금 확충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이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 등 은행들은 인적 구조조정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행들이 지금보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은행권의 위기가 은행 간 몸집 불리기 경쟁과 방만한 경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은, 금융 개방에 맞서기 위해서는 덩치를 키워야 한다며 외형 확대에 매달려왔다. ‘묻지마’ 식으로 대출을 확대하고, 점포와 직원을 늘리면서도 안정성 강화를 위한 리스크 관리는 등한시했다. 결국에는 외환위기 시절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다시 한 번 위기에 약한 허약 체질을 가지게 되었다.

은행들은 부동산 투기 바람이 거세게 일었던 2004년 중반부터 아파트 담보 대출을 늘리는 등의 몸집 불리기 경쟁을 본격화했다. 부동산시장 규제가 강화된 2006년부터는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며 위축된 가계 대출을 보완했다.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이 2005년 11조원에서 2006년 43조5천억원, 2007년 65조1천억원으로 2년 새 6배나 늘어났다. 그 결과 은행 대출 증가율이 실질 국내총생산 증가율을 넘어섰고, 1998년 5백65조원이었던 은행권 총 자산 규모는 올 6월 기준 1천7백37조원으로 세 배나 커졌다.

외환위기를 맞아 점포와 인원을 대폭 축소했던 은행들은 2002년 이후 몸집 불리기 경쟁에 나서며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덩치를 키웠다. 소매 금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이다. 2001년 4천6백97곳이었던 국내 시중 은행의 점포 수는 지난해 9월 말 기준으로 5천6백47개로 늘어났다. 임원과 일반 직원 수 역시 3백70명과 7만4천4백25명으로 1998년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이들이 받는 평균 임금도 6천8백8만원으로 섬유업종 평균인 2천9백64만원의 두 배가 넘는다.

김종민 삼성증권 크레디트애널리스트는 ‘2009년 크레디트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현재 크레디트시장의 문제는 은행권의 유동성 위험, 자산 건전성 악화 위험, 자본 완충력 저하 위험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은행권의 부실 자산 규모가 50조원을 웃돌면 현재까지 나온 대책으로 막기는 역부족”이라고 진단하며 공적자금 투입과 은행권 구조조정 이슈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은행들이 규모를 확장하고 자기 배 불리기에 치중하는 등 방만한 경영을 해오면서 위기를 자초했기 때문에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이 본격화될 경우 은행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홍익대 경제학과의 전성인 교수는 “아직까지 은행 문을 닫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는 적절치 않다. 은행 수가 적고 하나하나의 비중이 커지며 은행 산업이 과점화된 현재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키코 관련 손실이 현재화되고 건설 관련부실이 장부에 반영되는 시점에서 은행의 BIS 비율이 8% 이하로 떨어지고 공적자금 투입이 가시화될 경우 은행 부실화에 대해 책임을 묻는 작업은 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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