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위태로운‘고공 줄타기’ 언제까지
  • 김영화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09.01.06 02:4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형오 국회의장, 여야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대타협’ ‘파국’ 기로에

ⓒ연합뉴스
새해에도 계속되는 여야의 법안 전쟁에서 가장 마음고생이 심한 사람은 아마도 김형오 국회의장일 것이다. 그 고민의 깊이는 지난 12월27일 그의 홈페이지에 오른 한 장의 사진에서도 일단이 엿보인다. 사진은 민주당의 국회의장실 점거와 한남동 공관 항의 방문으로 서울을 떠난 그가 경남 양산 선영에 들러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을 담고 있다. 한 측근은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린 것은 연말에 내놓은 중재안이 고뇌 속에 나온 결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의장은 이번 법안 전쟁 내내 외로운 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측 모두로부터 거부당한 김의장의 ‘국회 정상화를 위한 중재안’이 이런 상황을 웅변한다. 김의장은 한나라당에게는 85개 중점 법안의 연내 처리 포기를, 민주당에게는 12월29일 밤 12시까지 본회의장 농성을 풀 것을 요구했다. 중재안은 임시국회 만료일(1월8일)까지 대치 상황이 계속되면 직권상정이 불가피하다는 경고도 담았다. 어느 한쪽의 손을 완전히 들어주지 않은 나름의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 중재안은 나중에 여야 모두로부터 거부당해 공중에 붕 떠버린 신세가 되었다.

한나라당 “도대체 의장은 누구 편이냐”

김의장이 지난 12월30일 저녁 8시40분을 기해 질서유지권을 발동했지만, 예고했던 연말 본회의장 강제 해산 조치는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질서유지권은 아직 의사당 출입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로 인해 한나라당으로부터는 “도대체 의장은 누구 편이냐”라는 강한 불만을 샀지만, 민주당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민주당은 여전히 ‘결국 직권상정을 위한 명분 쌓기이다’라고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그가 이처럼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짊어진 숙명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은 국가 의전 서열이 대통령 다음이고,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보다 앞선다. 한 달에 판공비조로 7천만원의 예산을 받고, 모든 법안·예산안이 의장의 사회권을 통해서만 통과되는 등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화려하다. 하지만 한국의 국회의장은, 다수당의 실질적 리더로서 국회까지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입법 권력의 상징인 미국의 하원의장에 비교하면 그 위상이 매우 초라하다. 당적 보유가 금지된 한국의 국회의장은 엄정 중립의 입장에서 방망이만 두드리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직권상정이라는 상당한 권한이 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늘 정쟁의 한복판에 서서 여야로부터 상반된 압력에 시달리는 처지가 될 뿐이다. 85개 쟁점 법안 처리 강행을 주장하는 한나라당과 결사 저지에 나선 민주당 사이에 낀 김의장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이번 법안 전쟁은 정권 교체 첫해에 벌어져 양측 모두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다. 기본적으로 의장의 중재력이 먹히기가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실제로 10년 만에 집권 여당이 된 한나라당은 “집권 초 힘이 있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당연히 거치는 통과 의례이다” “대선과 총선에서의 압승은 여권 뜻대로 정책을 세우라고 위임한 것이다”라는 등 힘의 논리를 더 앞세웠다. “국회가 속도전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의 발언은 그 정점에 서 있다. 여기에는 촛불 정국과 뒤이은 경제 위기로 집권 1년차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한 만큼 집권 2년차 정국에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서는 해를 넘기기 전에 중점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여권의 절박함이 자리하고 있다.

민주당의 처지에서도 이번 법안 전쟁은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이다. 여당이 밀어붙이는 법안은 반민주적이고 사회를 편 가르는 악법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인식이다. 더구나 모든 야당이 일방 처리에 반대하고 있고 민심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있어 충분히 싸울 명분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정치적 위상 높이느냐, 깎이느냐 시험대 올라

김의장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직권상정을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한나라당의 편을 들어주자니 입법부 수장으로서 위신이 서지 않고, 그렇다고 민주당의 본회의장 점거를 눈 감아주자니 친정인 한나라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재 중립적인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당이 청와대 지시에 따라 무리하게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야가 합의 처리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80%가 넘는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중점 법안 가운데 65건은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아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장이 한나라당 요구대로 쟁점 법안을 무더기 직권상정하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 반대로 민주당의 본회의장 점거는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대화와 타협, 표결과 다수결이라는 의회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민주당 내부에는 투쟁의 분위기를 살려나가야 떠나간 지지층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고 보는 기류가 적지 않다. “어정쩡한 타협을 하느니 끝까지 저항해 산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낫다”라는 밑바닥 정서가 처음부터 이성적 대화를 어렵게 한 것도 사실이다. 김의장이 언제까지 민주당의 본회의장 점거를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직권상정이냐, 아니냐를 놓고 정치적 줄타기를 거듭하는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거론된다. 바로 김의장이 역대 의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자기 정치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그가 의장 임기를 끝으로 정치 인생을 마감할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국회의장이나 당 대표냐를 놓고 진로를 저울질했었다. 그러다 국회의장 자리를 선택한 것은 집권 초 당 대표는 언제 낙마할지 모른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의장 임기가 끝나면 다시 당 대표를 노릴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김의장이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에 내려가 중재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것을 두고 정가에는 “마치 대선 주자인 양 행동하고 있다”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김의장은 현재까지 비교적 입법적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고 청와대의 입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축에 속한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오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의 눈치를 살피며 직권상정 카드를 아무 고민 없이 꺼내들었던 사례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새해 들어 여야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기 시작하면서 정국은 대타협이냐, 파국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만약 여야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다면 김의장의 정치적 위상은 급속도로 높아질 것이다. 파국의 위기에서 대타협의 실마리를 이끌어낸 정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여야의 대치가 끝내 풀리지 않으면 그는 직권상정 카드를 빼들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의장은 언제 본회의장에서 민주당 의원들을 퇴거시키고 몇 건의 법안을 직권상정해 처리할 것인지 마지막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직권상정은 필연적으로 물리적 몸싸움을 수반한다. 등산용 로프로 인간 사슬을 만들어 의장석을 사수하겠다는 민주당 의원들의 결의가 워낙 단호해 몸싸움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이미지가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