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미술관의 ‘눈부신’ 방한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9.01.13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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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센터 특별전> <피사로 전>, 프랑스의 자존심·피사로와 가족, 친구 그림 선보여

▲ 지우세페 페노네의 .

방학이 되면 으레 서양 거장들의 대형 전시들이 넘친다. 지난 1990년대 이래 우리 문화 산업에서 ‘관람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몰라볼 정도로 커졌다. 미술시장은 주로 작품의 거래에 치중해오다가 불과 10여 년 사이에 관람 산업이 급신장하게 되었으며, 우리 문화의 풍속도마저 변화시키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장 이름을 내세우면서 물타기를 하고 타이틀과 내용물이 상이해 관객을 우롱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장의 이름을 끼워넣고 미디어 홍보에만 집중하면 흥행이 되는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전시들이 버젓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관람자들의 수준과 안목이 높아지고, 인터넷 등의 커뮤니티나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교환이 활발해 그런 전시들이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이번 겨울 시즌 대형 전시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전시가 <퐁피두센터 특별전>(2008년 11월22일~2009년 3월22일,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이밖에 옥스포드 애쉬몰린 박물관 소장품으로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구성 자체가 짜임새 있는 <피사로 전>(1월6일~3월25일, 고양시 아람누리미술관)도 입소문을 통해 호평을 받고 있다.

퐁피두센터는 프랑스 문화의 상징이자, 문화적 자존심으로 통한다. 2차 대전 뒤 현대미술의 패권을 파리가 뉴욕에 넘겨주고, 20세기 말에는 그나마 유럽의 미술 중심까지도 런던에 넘겨주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퐁피두센터를 둘러본 사람들은 그런 느낌이 근거 없는 편견임을 깨닫게 된다. 현대예술의 미래가 여러 예술 장르 및 전시, 정보, 교육 등 다양한 영역과의 소통에 있다고 내다본 그들의 인문학적 통찰은 틀리지 않았다. 거대 자본에 휘둘리는 현대미술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도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정과 영감을 통해 동시대인들과 소통하고 교감하고자 하는 노력이 세계인들에게 어필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미술 한눈에 볼 수 있어

이번 전시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모두 퐁피두의 명성과 시스템 그대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퐁피두측에서 주제에 따라 엄선한 작품이 총 79점으로 20세기 미술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면서 작품의 크기도 주제에 충실하기 위해 초대형 작품도 꺼리지 않는 구색과 구성이 돋보인다. 그 79점 가운데는 6m가 넘는 후앙 미로의 <어둠 속의 사람과 새>를 위해 특수한 포장과 운송을 한 것이나, 앙리 마티스의 대형 연작들, 방 하나를 가득 메운 방향(芳香) 설치 작품 지우세페 페노네의 <그늘을 들이마시다>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들이 쏟은 관심과 열정을 확인할 수 없다.

▲ 카미유 피사로의 .

‘화가들의 아르카디아’라는 전시 타이틀 아래 황금 시대, 전령사, 낙원, 되찾은 낙원, 풍요, 허무, 쾌락, 조화, 암흑, 풀밭 위의 점심식사 등의 소주제로 구분된 구성이 20세기 예술가들의 이상 내지는 이상향의 단면들을 요약하고 있다. 이들이 해석하는 20세기 미술은 미국의 그린버그와 같은 이가 해석하는 식의 변증법적 지적 유희나 개념의 격투기 같은 면보다는 의식 너머의 소박하고도 근원적인 충동과 동기들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훨씬 인간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왕 막대한 예산을 들여 관람하는 것이라면 시각적 형식만이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한 이해까지도 깊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관객은 단순히 서구에서 유명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우리도 따라 보고 즐겨야 한다는 식민지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입장에서 그들이 예술을 통해 생각하고 표현하는 궁극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까지도 요구하는 수준으로 성숙해 있다. 따라서 이 전시는 예술 작품의 이해를 천편일률적인 교과서적 방식으로 해온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다. 우리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받아온 교과서적 학습 내용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신화로 시작해 신화로 종결을 짓는 해석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것 자체가 서구의 신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혼돈일 수도 있지만, 신화의 궁극적 요체가 결국 보편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자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해할 때 그들의 담론의 맥락은 어느 정도 잡힐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개념들이 탑재된 현대미술이 아니라, 우리 내면 어디에선가 꿈틀거리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이해시키는 현대미술, 이야기가 있는 동시대 미술을 만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거장 <피사로>의 작품 전시는 피사로와 가족, 친구들의 그림들이 혼재되어 있는 전시이다. 일견 피사로의 명성에 편승한 그렇고 그런 전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 전시를 관람한 사람들은 색다른 구성에 흥미를 느끼고 만족도를 표시한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보니 다른 대형 전시만큼의 홍보를 펼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관객들은 그것이 물타기인지 아닌지를 쉽게 알아보는 것 같다.

▲ 후앙 미로의 .

인상주의 미의식 단면 엿보게 해주기도

단적으로 이 전시의 타이틀은 <에라니 파(Eragny School)>전이라 해야 할 내용이다. 영국의 애시몰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피사로를 중심으로 한 동시대 작가들과, 화가가 된 피사로 자녀들의 작품들이 함께 조합된 구성이 흥미롭다. 크게 보면 인상주의에 동참한 시대적 미의식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면서도, 좁게 보면 에라니 화파를 일군 그의 가족들의 예술적 여로를 다룬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전시라 할 수 있다.

피사로와 그의 가족들이 동참한 인상주의. 미술사에서는 20세기 현대미술의 단초를 마련한 혁명적인 양식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은 동시대의 현대미술이 아니라 19세기의 바로 이들의 것이다. 또한 실제로 오늘날에도 가장 많은 화가들이 선호하는 화풍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세계인들이 그토록 인상주의 화풍을 좋아하는 것일까. 인상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으레 ‘빛의 과학적 분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아울러 중산층 미의식의 해방적 표출이라고 설명되곤 한다. 더 나아가서는 원근법에 근거한 오랜 서양의 시각을 뒤엎은 ‘평면성’의 자기 반성이라는 개념의 덧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동시대인들이 사랑하는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은 일단 밝은 화면과 자유롭고도 따뜻한 그리기라는 점을 장점으로 하고 있다. 굳이 개념의 설명이나 소통을 강조하지 않아도 눈을 통해 소통이 되고 가슴으로 교감을 할 수 있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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