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체스판’이 흔들린다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1.13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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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중앙아시아 축으로 한 패권 전략에 차질…러시아에 선수 빼앗겨

▲ 상하이 협력기구(SCO) 회의에는 러시아와 중국, 인도 등이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론들은 오바마 당선인이 후보일 때, 그의 외교 정책 고문 중 유독 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바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존스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 교수)이다. 그는 미국 민주당 내의 원로로 외교안보 전략가 중 가장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활동했을 당시부터 세계 정세에 미치는 그의 힘은 막강했다.

일찌감치 오바마 당선인을 차기 대통령감으로 낙점했던 브레진스키는 캠프에 합류하면서 오바마 외교 정책의 상징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당연히 그의 생각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의 책을 다시 탐독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브레진스키의 저작들 중 첫손에 꼽히는 것은 <거대한 체스판>이다.

브레진스키가 이 책에서 밝힌 기본 생각은 이렇다. ‘미국이 혼자서 패권을 영구히 가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국의 역할을 서서히 다른 국가에 배분해가야 한다. 다만, 갑자기 패권을 분산시키면 세계가 혼란해질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을 해치지 않도록 20~30년에 걸쳐 차분히 해나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기 동안 중국·러시아·이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미 동맹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끼치는 과도한 영향을 우려한다는 점에서 네오콘과 차별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것은 아닐지 위기감을 가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차기 오바마 정부의 외교 정책의 기본 바탕에는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기류가 깔렸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국제 정치상의 많은 문제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에 관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협력이 없다면 미국은 이란을 제재할 수 없다. 이미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이란 제재에는 더 이상 협력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전략상 실책이 원인이었다. 미국은 과거 체첸이 독립을 시도하고 그루지야·우크라이나·아제르바이잔·몰도바 등 구 소련권 독립 국가 중 반러시아적인 나라들이 모여 ‘GUAM’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며 국제적으로 대러시아 포위망을 좁혀갔다. 반면, 러시아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그다지 강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실수를 거듭하고 미국 중심의 패권이 약해지면서 변화했다. 지난해 8월 그루지야 전쟁에서 러시아는 구 소련이 붕괴된 이후 처음으로 외국(그루지야)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며 강국으로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루지야 전쟁이 일어난 직후 열린 상하이 협력기구(SCO) 회의에서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방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라는 문구가 삽입된 것이 그 증거였다. 

이스라엘·중동에 관한 대외 정책 바뀔 수도

미국의 기본적인 전략은 중동으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민족 분쟁을 자극하는 것이다. 특히 중동의 경우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종교와 민족 분쟁이 겹친 이곳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이다.

흥미로운 점은 브레진스키가 이스라엘을 상당히 냉철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인 <포린폴리시> 2006년 7/8월호에서는 이스라엘의 로비에 관한 토론 기사가 있었다. 4명의 패널이 등장했는데 3명은 이스라엘의 로비에 찬성하는 쪽이었고 한 명만이 반대했다. 그 한 명이 바로 브레진스키이다. 미국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브레진스키의 이런 시각 때문에 이스라엘과 중동에 관한 미국의 대외 정책이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일고 있다.

부시 정부 말기부터 미국의 중동 정책은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전체 전략의 일부에 포함되었다. 특히 이라크 철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며 전략의 중심축을 중앙아시아로 가져가는 데 오바마도 동의하고 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침략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풍부한 자원 놓고 벌이는 선진국들의 ‘뉴그레이트 게임’

남코카서스 지역(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등)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땅 따먹기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의 양상을 두고 19세기 러시아와 영국 등의 다툼을 일컫는 ‘그레이트 게임’에 빗대어 ‘뉴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동과 엇비슷한 매장량으로 추정되는 카스피해 유전과 중앙아시아의 천연가스 이권과 그 수송 경로 확보를 위해 선진국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이 게임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게 ‘과거의 라이벌’인 러시아와 ‘가장 말 안 듣는 이란’, 서진하고 있는 중국 등과 연결 고리를 이루는 코카서스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곳이다.
카스피해의 남서쪽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구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이다. 오스트리아 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국토에 약 8백만명이 산다. 인구의 90%가량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는 명물 아닌 명물이 있다. 마치 한국전쟁 때 들어선 부산의 판잣집처럼 바쿠에 위치한 산의 경사에는 난민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에서 뽑아내는 석유를 이용해 연평균 10%가량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왔다. <이코노미스트>는 전세계의 동반 침체가 우려되는 2009년에도 아제르바이잔의 경제성장률이 7%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면의 거대한 난민은 경제 성장이라는 허울에 가린 또 다른 아제르바이잔의 모습이다.

난민들의 대부분은 아제르바이잔 남서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아제르바이잔 전체에서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도 아르메니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1988년부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져 1994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무려 3만여 명이 사망하고, 100여 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비록 휴전 상태이지만 여전히 양측의 충돌은 계속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면서 구 소련의 변방 국가들에 대한 모스크바의 안테나는 느슨해졌다. 1988년 이곳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로 편입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분쟁의 시작이었다. 1992년 아르메니아인들만의 일방적인 주민투표가 실시되고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태는 확대되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군사적으로 도왔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은 아르메니아 정규군에게 이슬람 민병 조직으로 대항했다. 분쟁은 당연히 아르메니아측에 우세하게 진행되었다.

브레진스키 “유라시아에서 세계 패권 둘러싼 싸움 벌어질 것”

▲ 팔레스타인 재소자들이 이스라엘군의 미사일 공격에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그레이트 게임’이라는 큰 판에서 살펴보면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는 매우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갈등의 당사국인 아르메니아의 존재는 작지 않다. 러시아는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서 터키와 구원(舊怨)인 아르메니아를 이용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주장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아르메니아인 100여 만명을 학살했다.

러시아만큼이나 미국도 아르메니아를 지원하고 있다. 학살의 과거 때문에 ‘코카서스의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아르메니아인은 미국과 유럽에서 강력한 로비 활동을 펼치고 지원을 받는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정전 감시단은 미국과 유럽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덕분인지 1994년 휴전협정은 아르메니아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었다. 그렇다고 아제르바이잔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는 카스피해의 대표 상품으로 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에 투르크메니스탄을 보탠 중앙아시아 5개국과 카스피해를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코카서스 3개국은 모두 1991년의 구 소련의 붕괴에 의해서 독립한 나라들이다.

이 지역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풍부한 자원이다. 카자흐스탄이나 아제르바이잔은 원유·천연가스가 풍부하고,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은 비철금속 매장량이 넘친다. 카스피해 지역에서는 대규모 유전과 천연가스 개발이 논의 중이다. 그리고 수송 지역으로 가지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다. 이곳의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은 선진국들의 끊임없는 먹잇감이 되고 있다.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는 향후에도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싸움이 전개되는 체스판이 될 것이다. 이 싸움에서는 지정학적 전략이 중요하다. 1940년 11월 세계의 패권을 목표로 하고 있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비밀 교섭을 통해 미국을 유라시아로부터 배제하기로 합의한 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그의 저서인 <거대한 체스판>에서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영향력이 중앙아시아에서 확대되는 데 필요한 지정학적인 요충지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구 소련이 데탕트(긴장 완화)를 깨면서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목적은 중앙아시아의 천연 자원과 그것들을 옮길 수 있는 수송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구 소련이 패배해 물러났지만 미국은 브레진스키의 주장과 달리 이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중앙아시아에서 힘의 공백이 생기자 중국과 인도 그리고 영향력을 되찾고 싶어 하던 러시아가 여기에서 만났다. 미국은 그때야 관심을 보이며 이들보다 한 발짝 늦게 출발했다.

하지만 미국이 늦게 출발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뉴그레이트 게임’은 더욱 가열되었다. 미국의 출발이 빨랐다면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게임은 끝났을 것이다. 한 발짝 늦게 출발한 미국은 자신들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 작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미국은 키르기스스탄에 마나스 공군기지를 건설했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즈 기지, 타지키스탄의 두샨베 공항 등도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카자흐스탄 상원이 미군기지 이용 조약을 6년 만에 비준하면서 알마티 공군기지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미국의 진출을 견제하는 움직임도 있다. 러시아는 구 소련 해체 후 처음으로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외곽에 칸트 러시아 공군기지를 개설했다. 개설 공식 행사에서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과 당시 푸틴 대통령은 두 손을 서로 단단히 잡으며 단합을 과시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서, 키르기스스탄은 미국과 러시아 쌍방에게 기지 제공의 대가를 얻을 수 있어서,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었다.

미국의 중앙아시아 전략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인도 뭄바이의 동시 폭탄 테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결과도 묘연하게 만들었다. 파키스탄의 정국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는 미군의 보급 물자 중 75% 이상은 파키스탄을 거치는 경로를 통해 도착한다. 지금 그 보급로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국제 치안 지원부대(ISAF)측은 “공중으로 보급하는 것은 경비 때문에 어려워 해상 루트를 이용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으로 물자를 반입하려면 바다를 끼고 있는 이란이나 파키스탄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 이란이 도울 리 없으므로 결국, 최근 반미 감정이 폭발하고 있는 파키스탄에 협력을 구해야 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건너려면 산악 지대인 페샤와르나 남서부 지역인 쿠에타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결국,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을 설득해 북쪽에서의 반입 루트를 개척해야 한다. 그러나 두 나라가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전면적인 협력을 바라기는 힘든 상태이다.

러시아와의 협력 못 얻어낸 것이 패착

유명한 보수적 지식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실수를 계속하는 부시 정부가 미국의 패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력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코소보 독립을 용인하고 폴란드에 GMD를 배치하는 등 러시아와 협조하기 위한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따라서 미국의 패권은 쇠퇴해 다음의 미국 정부는 사라져가는 패권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러시아는 후쿠야마의 지적대로 다극화를 위한 작업에 나섰다. 러시아의 위상은 푸틴의 통치 기간 동안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상당히 올라갔다. 특히 자국의 석유, 천연가스를 이용한 에너지 외교가 효과를 발휘했다. 게다가 고도의 경제 성장은 러시아의 군사적 이미지를 바꾸어놓았다.

브레진스키가 러시아와 함께 체스판의 다른 말로 언급한 중국, 인도 등 세 국가가 그리고 있는 밑그림은 미국이 가장 피하고 싶은 모습이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는 서로 협력을 구상하는 단계를 넘어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다. 특히 이들 나라가 모두 참가하고 있는 상하이 협력기구(SOC)에는 지구상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에너지 전략을 조율하고 합동 군사훈련도 실행하는 등 미국의 일극 체제를 무너뜨리는 프로세스를 진행 중이다.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지난 2005년 봄 인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 중국, 인도 이 영향력 있는 3개국이 서로 협력하며 세계의 평화와 ‘국제 관계의 민주화’에 기여할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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