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2, 3세들 난세 틈타 ‘왕좌’ 앞으로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1.13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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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그룹 인사에서 후계자들 대거 승진 “양도세 적은 시기 노려 경영권 세습” 비판도

재계에 2, 3세 경영 시대가 열리고 있다. 주요 재벌 그룹의  2, 3세들이 연말연시 인사에서 대거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주가가 반 토막이 나는 약세장이 펼쳐지는 상황을 주요 기업들은 경영권 승계의 호기로 삼고 있다. 저평가된 자사 주식을 대량 매집해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후계 구도를 좀더 탄탄하게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업계 맞수인 한진과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대표적이다. 두 그룹은 지난 연말 인사에서 오너 3세 경영인들을 핵심 보직으로 이동시켰다. 한진의 경우 조양호 회장의 장남인 조원태 상무가 그룹의 핵심 보직인 여객영업본부 부본부장에서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올 초 ㈜한진의 등기이사와 IT 계열사 유니컨버스의 대표이사에 선임된 데 이어, 물류 계열사인 한덱스(구 세덱스)의 등기이사까지 맡았다. 그의 소유 지분에도 변화가 있었다. 조상무는 남매인 조현아 대한항공 상무, 조현민 대한항공 과장과 함께 최근 대한항공 주식을 잇달아 매수하면서 지분율을 0.05%(1만8천주)나 끌어올렸다. 변동 폭이 크지는 않지만, 조상무의 최근 인사와 맞물려 후계 구도 다지기라는 얘기가 그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항공업계 맞수, 경영권 승계에서도 ‘경쟁’…여성 후계자 전면 등장도 눈길

금호아시아나의 움직임은 더욱 주목된다. 금호아시아나는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에 이어, 장남인 고 박성용 회장, 차남인 고 박정구 회장, 삼남인 박삼구 회장 등 형제들이 경영권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차기 경영권을 박회장의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이어받을 수 있을지가 큰 관심거리이다. 그러나 그룹 분위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연말 인사에서 박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전략경영본부 상무보가 ‘보’를 떼고 상무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금호아시아나측은 “상무보로 2년 근무하면 자동으로 ‘보’를 떼게 된다. 특진도 아니고, 다른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연한을 채우고 승진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상무는 최근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금호산업의 주식 4만1천8백10주(0.07%)를 매입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큰 변화가 없었던 3세들의 지분 구도에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박상무의 승진과 지분 매입으로 그가 그룹 경영을 떠맡게 되리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올 2월 정기 인사를 앞둔 효성그룹의 후계 구도도 관심을 끈다.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이 승진을 통해 경영 전면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점쳐지기 때문이다. 조회장은 아직까지 분명한 후계 구도를 밝히지 않고 있다. 나이에 따라 장남인 현준씨가 사장, 차남인 현문씨가 부사장, 막내인 현상씨가 전무를 맡고 있을 뿐 후계와 관련해서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것이 효성측의 설명이다. 세 사람이 공평하게 섬유와 무역, 중공업, 전략 부문을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지분 구도 역시 삼 형제가 균형을 유지해와 누가 경영 대권에 가까이 있는지 속단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조현문 부사장과 조현상 전무가 지난해 말 자사주를 각각 2만주와 1만주 매입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조부사장의 경우 이전에도 14만9천3백70주를 장내 매수한 적이 있다. 이로 인해 둘째인 현문씨의 보유 주식 수가 6.99%로 장남인 현주씨의 지분율(6.94%)을 앞서게 되었다.

LS그룹, 두 형제가 계열사 회장으로 나란히 승진

구자열 LS전선 부회장과 구자엽 LS산전 부회장 역시 이번 연말 인사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장남인 자열씨는 그동안 LS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미국 최대 전선회사인 슈페리어 에식스 인수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2004년 가온전선 대표이사로 취임한 자엽씨 역시 기업 체질 개선과 경영 시스템 혁신 등을 통해 회사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형제의 이번 승진으로  LS그룹의 후계 구도에는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게 되었다. 

이밖에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승담씨 역시 지분을 늘리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동양메이저 주식을 사들였다. 이로 인해 74만1천6백44주(0.87%)였던 보유 주식이 83만1천7백54주(0.97%)로 9만주가량 늘어났다.

중견 기업에서도 약세장을 틈탄 2세나 3세들의 지분 확보나 승진 인사가 잇따르고 있다. 넥센의 경우 지난해 자사주를 꾸준히 매입해온 강병중 회장의 외아들 강호찬 부사장이 이번 인사에서 넥센타이어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되었다. 김희철 벽산건설 회장의 차남 김찬식 전무도 최근 부사장에 취임했다.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차남 종훈씨는 지난 1월2일 이사에서 경영정보 담당 상무로 승진했다.

이렇듯 새해 들어 주요 그룹의 2, 3세가 경영 전면으로 대거나섰다. 김상국 경희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위기 상황에서 오너들이 경영 일선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재벌들은 경영권을 자녀들에게 넘기는 정지 작업을 가속화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벌 기업에서 친정 체제가 강화되어 결국,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사라지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여성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는 “결국, 주가가 낮을 때 경영권 승계 작업을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주가가 낮으면 양도세 또한 줄어든다. 기업 경쟁력을 올리기보다는 난세를 틈타 경영권을 세습시키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올해 재계의 후계 구도를 보면 여성 2, 3세의 약진도 눈에 띈다. 재벌가 여성 경영인은 그동안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 정지이 현대U&I 전무,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 등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인사에서 여성 후계자들이 대거 경영 전면에 나섰다. 지난 1월1일 동양매직 부장에서 상무보로 승진한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장녀 정담씨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녀는 지난 2006년 10월 동양매직 차장으로 입사한 지 불과 2년 만에 또다시 승진했다. 특히 현상무보는 현재 동양매직 지분 4.57%를 보유하고 있어 경영권을 넘겨받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딸인 주연씨도 이사에서 인재개발 담당 상무로 승진했다. 보령제약의 경우 창업주인 김승호 회장의 장녀 김은선 그룹 부회장이 회장으로 올라섰다. 국내 제약사 가운데 창업주의 딸이 주력사의 회장직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몽선 현대시멘트 회장의 장녀 재은씨와 차녀 예린씨도 지난해 10월29일 장내 매수를 통해 지분을 늘렸다. 재은씨는 얼마 전에도 2천2백10주를 매입해 지분율을 1.57%로 끌어올렸다. 장남 형선씨도 지난해 10월 말 7백주를 매입했다.

이에 앞선 지난해 7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딸 주원씨는 김회장으로부터 동부CNI 지분 상당수를 증여받아 후계 구도 다지기에 나섰다. 조양호 한진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 대한항공 상무는 승진 명단에서 빠졌지만, 그룹 계열사인 항공종합서비스 등기이사에 선임되는 등 동생 원태씨와 함께 경영 수업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올해 재계 인사의 화두 중 하나가 여성 2, 3세의 약진이다. 이들은 기존 오너 3세 여성들과 함께 재계에 새로운 인맥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나 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의 승계 작업은 주춤하는 모양새이다. 이전무는 해외 순환근무를 하면서 차기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측근들과 회동하는 등 외연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당분간은 국내 복귀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적어도 2~3년 정도는 순환근무를 통해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당장 경영권 승계 작업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부회장 승진설이 나돌았던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경영권 승계 논의도 가라앉아 있는 상태이다. 기아차는 지난해 자동차업계의 실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경영으로 신차 판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나름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정사장이 연말 인사에서 현대차로 수평 이동한 뒤, 부회장에 승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그룹이 올해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상황에서 정사장을 ‘소방수’로 내세우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정몽구 회장은 아직까지 8천4백억원의 사회공헌기금 출연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룹 안팎으로 사정이 어려워 후계 문제를 논의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현대·기아차그룹측의 설명이다.

삼성·현대차·롯데 등 후계 구도는 안갯속

롯데그룹에서는 신격호 회장의 등기이사직 사퇴와 지분 및 부동산 처분으로 경영권 승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신동빈 롯데 부회장과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 중에서 누가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를지는 미지수이다.

이는 정몽근 명예회장의 은퇴로 아들인 정지선 부회장이 사실상 그룹의 총책임자가 된 것과 비교되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지분 문제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부친으로부터 주식을 증여받은 후 1천1백30억원의 증여세를 완납했다. 정부회장의 동생인 정교선 현대홈쇼핑 부사장 역시 지난해 12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사실상 승계 작업을 마무리했다.

애경그룹의 경우 채형석 총괄부회장의 검찰 구속으로 승계 구도에 비상이 걸렸다. 채부회장은 지난 2006년부터 사실상 그룹의 총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신성장 동력 발굴 차원에서 추진한 저가 항공 사업 진출이나 분당 삼성플라자 인수도 채부회장이 진두지휘해왔다. 그러나 그가 검찰 조사에서 횡령 혐의로 구속되면서 일정 기간 경영 공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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