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였나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1.13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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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회장, 부산·경남 근무 전·현직 검찰 간부들과 절친…법조계 안팎 4명의 실명 나돌아

▲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가운데)이 지난해 12월12일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나서는 중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탈세와 뇌물공여, 입찰 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인’인 그에 대한 첫 공판이 지난 1월5일 열렸다. 1시간30분 정도 진행된 그날 재판에서 재판장이 신문에 들어가자 박회장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짧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변호인이 재판 내내 변론을 맡았다. 박회장은 검사가 자신에 대한 공소 사실을 낭독할 때 ‘피식’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서 가끔씩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쳐갔다. 박회장은 그날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주눅 들거나 의기소침한 표정은 아니었다. 검찰이 제기한 각종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박회장은 제법 당당해보이기까지 했다.  

박회장이 구속되면서 정·관계 인사들에게 금품 로비를 벌인 것으로 의심되는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검찰도 이 부분과 관련해 현재 박회장의 부인 등 친인척과 측근들에 대해 폭넓게 계좌 추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법조계 안팎에서는 박회장의 법조계 인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여기서 박회장의 법조계 인맥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검찰 인맥으로 좁혀진다. 검찰 안팎에서는 실명이 거론되고 있는 마당이다. 그러면서 박회장의 검찰 인맥이 막후에서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검찰 간부 출신 고위 공직자 L씨, 박회장 혐의에 일부 연루’ 첩보도

사정 기관의 한 관계자는 “박회장은 부산·경남 지역에 사업 기반을 두고 활동해왔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근무했다가 현재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는 검찰 간부들뿐만 아니라 평검사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에는 현직을 떠난 거물급 전직 검찰 간부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법조계 일각에서는 부산 지역에서 근무했던 검사치고 박회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과장 섞인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이는 박회장 인맥이 정·관계뿐 아니라 법조계에서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통상적으로 검사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근무하기 때문에 부산·경남 지역을 거쳐간 이들을 일일이 꼽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수적으로도 적지 않다. 다만, 그들 가운데 박회장과 각별하게 지냈던 전·현직 검찰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법조계와 사정 기관 안팎에서는 박회장을 비호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전·현직 검찰 인사로 4명의 실명이 조심스럽게 오르내리고 있다. 이들 역시 부산·경남 지역에서 검사 생활을 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검찰 고위 간부 출신으로 현재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 ㄱ씨이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ㄱ씨는 부산에서만 여러 차례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그곳에서 박회장과 처음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와 박회장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있다. 몇 년 전 ㄱ씨는 검찰을 떠나 서울 서초동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런데 변호사 사무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박회장이 사무실 임대 보증금 수억 원을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박회장이 사무실을 마련해준 뒤 몇 년 후 ㄱ씨가 변호사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변호사 사무실이 입주해 있던 빌딩의 건물주가 임대 보증금을 누구에게 되돌려주어야 할지 박회장측에 문의를 했다고 한다. ㄱ씨가 변호사 사무실을 사용했지만, 임대 보증금은 박회장측에서 대납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회장측에서는 임대 보증금을 ㄱ씨에게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억 원에 달했던 임대 보증금은 ㄱ씨가 챙겼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 ㄱ씨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박회장에 대한 검찰 조사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물론 검찰은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박회장 등에 대한 조사는 원칙대로 가고 있다. 누구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특히 ㄱ씨와 박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으나,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이라고 해서 ㄱ씨가 박회장 조사 과정에 개입할 수도 없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라고 역설했다.

ㄱ씨와 함께 박회장과 절친한 검찰 간부 출신 인사로 ㄴ씨가 거명되고 있다. ㄴ씨 역시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 검사로 일했으며, 변호사로 있다가 현 정부에서 다시 고위 공직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박회장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ㄴ씨의 거취가 위태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현재 몸담고 있는 기관에서 ㄴ씨와 박회장이 상당히 돈독한 관계이며, 박회장이 현재 검찰로부터 받고 있는 혐의와도 일부 연루되었다는 첩보가 입수되면서부터였다.

법조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ㄴ씨가 근무하고 있는 기관에서도 박회장과의 관계를 처음 알고서 상당히 난감해했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징계를 내릴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조만간 단행될 개각 과정에서 경질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내사 벌였으나 의혹만 남기고 ‘조기 종결’

이에 대해 ㄴ씨측은 “박회장과 관련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라는 입장만 밝혔다. 그럼에도 박회장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두 사람이 만났던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이 만나 검찰 수사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현재 검찰에서 고위 간부를 맡고 있는 두 명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이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공교롭게도 박연차 사건이 터진 이후 사표를 제출했다는 소문이 검찰 밖으로 새어나오기도 했다.

검찰은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박회장에 연루된 각종 의혹과 관련해 내사를 벌였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당시 박회장 비리 의혹과 관련된 첩보가 입수되어 내사를 벌였다. 하지만 별다른 단서가 없어 내사를 조기에 종결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박연차 사건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해 초 농협의 자회사인 휴켐스를 박회장이 헐값으로 매입한 의혹에 대해 내사를 벌였으나, 수사가 진척되지 못한 채 중단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지난해 7월 국세청이 박회장의 기업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하면서, 박회장의 법조 인맥이 청와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해 이례적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박회장의 검찰 인맥이 실제로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단순히 박회장과 친분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박회장 수사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했는지 섣부르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검찰이 ‘박연차 리스트’ 수사와 함께 법조계 안팎에서 나돌고 있는 박회장을 비호하는 검찰 인사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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