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할 일, 기계가 하더니…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1.20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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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 관리, 컴퓨터에 의존한 메릴린치는 ‘위기’…CEO가 직접 챙긴 골드만삭스는 ‘건재’

▲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증권 트레이더가 시시각각 변하는 시황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메릴린치 리스크 관리담당 임원은 지난 2007년 8월 스탠리 오닐 당시 회장에게 주택담보대출(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에 30억 달러를 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오닐 회장은 이 경고를 묵살했다. 이 임원이 리스크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메릴린치는 주택담보대출 관련 지수 상품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리스크 관리 담당 임원은 3개월 후 회사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 후 메릴린치는 주택담보대출 관련 파생상품 탓에 유동성 위기에 빠지고 결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합병되었다.

메릴린치는 리스크 평가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크게 의존했다. 이 프로그램은 갖가지 시장 지표를 변수로 해 회사나 상품에 노출된 리스크를 계량화했다.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나 감성적 불안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지표만으로 리스크를 수치화함으로써 신뢰성이 높은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당시 주택담보대출 관련 파생상품이 안고 있는 리스크를 낮게 평가했다. 지난 수년 동안 축적된 시장 정보에 기초해 리스크를 판단하다 보니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변수는 고려할 수 없었다. 지난 수년 동안 미국 집값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마불사’라는 전제까지 깔려있었다. 집값은 지속적으로 오른다고 전제하고 메릴린치 같은 대마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메릴린치의 비극’을 예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와 달리 세계 1위 투자 은행 골드만삭스에서는 최고경영자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산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리스크를 직접 관리했다. 리스크가 지나치게 커졌다고 판단해 회사 투자 전략을 바꾸는 것은 최고경영자의 몫이었다. 골드만삭스는 리스크 관리직과 매매 중개역을 수시로 보직 순환했다. 자기 영역에만 몰두하다 보면 시장이 보내오는 위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가 경쟁업체보다 비우량 담보대출 관련 파생상품 투자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덕에 메릴린치는 합병되었고, 골드만삭스는 세계 투자 은행업계에서 보기 드물게 독자 생존할 수 있었다. 워렌 버핏 버크셔헤셔웨이 회장은 골드만삭스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유동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 비우량 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신용 시장을 붕괴시키더니 실물 경제까지 흔들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위기는 이미 메인스트리트의 위기로 비화했다. 세계 금융 위기가 일어난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제 주체는 없다. 금융 기관이 수익성만 지나치게 추구했고 소비자는 자기 분수에 넘치게 소비했다. 정부는 시장 규제라는 임무를 방기했고, 신용평가 기관은 명성에 걸맞지 않은 평가 결과를 내놓았다. 스펙트럼을 지난 빛이 무지개색으로 뿌려지듯이 금융 위기의 원인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 갖가지 견해를 꿰는 단어는 ‘리스크’이다. 대출 자격이 미흡한 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면 금융 기관이 안는 리스크는 커진다. 월스트리트는 리스크를 모은 다음 잘게 쪼개서 분산하면 안전한 상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 근거는 지난 수년 동안 축적된 자료에 기초해 만든 수식이었다. 금융공학자들이 고안한 복잡한 산식에 맞춰 리스크를 분산하면 부실 위험은 회피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파생상품이라는 ‘자본의 괴물’

▲ 골드만삭스가 건재한 이유는 리스크 관리 시스템 덕이다. ⓒ연합뉴스

당초 리스크를 회피하거나 분산시키고자 고안된 것이 파생상품이다. 파생상품은 초기에 긍정적인 효과가 더 컸다. 실물 경제 주체가 위험을 회피하거나 분산시키기 위해 선물과 옵션을 도입했다. 옥수수 농가가 대표적이다. 옥수수는 세계 곡물 생산량의 3분의 1이나 된다. 식량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료나 연료로 소비되다보니 옥수수 수확량이 세계 원자재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옥수수 작황이 나쁘면 주요 식량 자원인 밀 생산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전세계적으로 수요량이 많다 보니 농가는 대단위로 옥수수를 재배한다. 자연 재해가 닥치거나 기후가 맞지 않아 수확량이 떨어지면 농가나 유통업계가 받는 타격은 치명적이다. 곡물 업계는 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파생상품을 만들었다.

금융공학은 기가 막힌 방법으로 리스크라는 무형물을 파생상품이라는 거래 대상물로 바꾸었다. 금융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계기는 냉전의 종식이다. 미국은 1980년대까지 옛 소련과 항공우주공학이나 무기 개발 영역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과학 천재들을 미국 항공우주국(NASA)으로 끌어들였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과학 예산으로 배정했다. 그 덕에 미국은 체제 경쟁에서 소련을 이겼다. 역설적으로 미국 과학자에게 소련 붕괴는 재앙이었다. 미국 항공우주국 연구원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유휴 인력들을 흡수한 곳은 미국 월스트리트였다. 미국 투자 은행들이 과학 천재에게 시킨 일은 리스크에 기초한 투자 상품의 개발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제는 복잡해졌다. 실물과 상관없이 리스크 자체가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온갖 과학기술과 공학의 성과물을 활용한 파생상품이 쏟아져 나왔다. 부채담보부증권(CDO)나 모기지담보부증권(RMBS) 같은 담보부 상품부터 신용부도스와프(CDS)나 신용연계채권(CLN)까지 파생상품에 투자하면서 투자 은행을 비롯한 미국 금융 기관은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파생상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죽었다. 인간의 탐욕이 인간성을 배제한 기괴한 피조물과 결합하면서 재앙을 잉태했다. 월스트리트에서조차 파생상품은 곧잘 ‘프랑켄슈타인’에 비유된다. 실체가 없는 리스크가 금융공학 기술과 교접하면서 괴물을 양산했다는 뜻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 월드파이낸스타워에 본부를 둔 투자 은행 RBC의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는 김선일씨는 “투자역마저 상품 속성과 리스크를 가늠하지 못한 채 천문학적인 금액의 파생상품을 거래하고 있는 것이 월스트리트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 경제학 박사인 에드워드 클락 캐나다 은행 토론토-도미니옹 최고경영자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회사 내 누군가는 이해하겠지라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상품에 투자해서는 안 된다”라고 밝혔다.

미국 투자업체 리스크관리협회(RMA)의 케빈 브레이클리 최고경영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금융 산업에서는) 리스크 분석 수식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제조업체 피트니보위는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되 판단은 인간에게 맡겼다. 공급 체계부터 평판까지 회사의 리스크를 16개 하위 범주로 나누고 임원에게 각자 맡은 영역에 대한 리스크를 판단하게 했다. 이 회사는 리스크를 숫자놀음으로 여기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판단력과 유연한 사고력이 산식보다 리스크를 정확히 판단한다고 믿었다. 랜달 크로즈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는 지난해 10월 금융 산업 세미나에서 금융 기관들에게 피트니보위와 비슷한 방법을 채택할 것을 종용했다. 미국 금융 기관들은 리스크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자산관리 업체들은 전 임직원이 리스크 관리나 조정 업무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백서를 발간하고 있다. 금융 산업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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