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시대’ 가고 ‘사람 시대’ 온다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1.20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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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속 ‘인간 존중 경영’ 새바람…해고·감원 대신 노사 화합에 역점

ⓒ그림 김형건

▲ LG화학은 인간 존중 경영을 통해 지난해 당기순이익 9천4백억원을 기록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지난 1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경제학회(AEA) 연례회동에서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졌다. 세계 경제 석학들은 현 사태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은 안갯속에서 장비 하나 갖추지 않고 암벽 등반하는 것’에 비유했다. 세계 경제는 안갯속에서 ‘인간’을 발견했다. 미국 월스트리트는 리스크 관리에 컴퓨터 프로그램보다 인간의 판단력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내 제조업체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실행하고 인재 확보 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또, 인간을 최우선시하는 조직 관리 접근법이 부각되고 있다. 인적자원관리(HRM) 시스템을 갖춘 회사는 위기에 대한 내성도 강했다. 이제 인간 존중 경영은 기업 성장과 경쟁력 강화의 필수 요소로 대접받고 있다. 사업 처분과 인력 감축만이 살아남는 길이라 여겼던 1998년 외환위기 때와 사뭇 다르다.

하지만 불황은 이제 갓 시작되었다. 경기 침체는 갈수록 깊어지고 길어진다. 시장의 불확실성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한국 경제의 신선한 시도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두고보아야 한다. 경기 침체의 강도와 기간이 한국 경제가 견뎌낼 한계를 넘어서면 1998년 외환위기 때로 회귀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개별 경제 단위가 시도하는 인간 존중 경영이 경쟁력과 효율을 높인다면, 그 개별 기업의 성공이 양적으로 축적된다면, 그만큼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커진다. <시사저널>은 ‘희망 찾기’에 나섰다. 인간을 최우선시하는 경영 기법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기업의 성공 사례를 통해 위기 극복의 희망을 찾고자 했다.

▲ 광고대행업체 김용운 사장(위 왼쪽 사진 맨 오른쪽)은 야근과 철야가 있을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한다. 위 오른쪽은 LIG의 호프데이 회식. ⓒ시사저널 임준선

온라인 광고대행업체 ㈜해머의 김용운 사장(46)은 토요일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 슈퍼마켓에 들른다. 회사 냉장고에 넣을 과일, 컵라면, 과자, 음료수를 사기 위해서이다. 직원들은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과일과 과자를 챙기고 커피메이커에서 갓 내린 아메리카노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자리에 앉는다. 식사 시간에는 회사가 지정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무료로 해결한다. 김사장은 “(직원들이) 차비만 있으면 회사에 다닐 수 있게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김사장에게 직원은 가족이다. 지난해 팀장 한 명이 과로로 쓰러지자 김사장은 40일 넘게 손수 간호했다. 치료비도 김사장이 지불했다. 김사장은 야근과 철야가 있을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한다. ㈜해머는 아직 불황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제 갓 두 돌이 지난 광고대행사가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다.

불황기에는 광고·마케팅 시장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을 감안하면 ㈜해머의 선전은 돋보인다. 김사장은 이에 고무되어 전 직원 월급을 5~10% 올리기로 했다. 올해 사업 목표는 직원들이 세웠다. 경기 위축으로 광고대행업체에게 재앙에 가까운 실적 악화가 예상되지만 ㈜해머 직원은 올해 매출 목표액을 지난해보다 높게 잡았다.

인간 존중 경영은 중소기업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LG화학은 최고인적자본책임자로 해석되는 CHO라는 직책을 두고 있다. CHO는 인재 개발과 인적 자본 관리를 주업무로 하는 부사장급 임원이다. 육근열 부사장(CHO)은 “과거 잘 짜여진 전략과 시스템을 통해 기업이 도약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물리적 시스템보다 ‘성과 창출, 리더십, 비전 제시’를 통해 사람 관리를 잘하는 기업이 사업에서도 성공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 실적을 창출하는 근원이 인간이고 사업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 요인도 인간’이라고 덧붙인다. 이 회사는 인간 존중 경영을 경영 이념으로 내건다. 임직원 사이 의사소통과 신뢰를 조직 운영의 기초로 삼고 있다.

LG화학, 최고인적자본책임자 두고 직원 관리

▲ 육근열 LG화학 CHO -“요즘에는 물리적 시스템보다 ‘성과 창출, 리더십, 비전 제시’를 통해 사람 관리를 잘하는 기업이 사업에서도 성공한다.” ⓒ시사저널 이종현

LG화학이 거둔 지난해 실적을 보면 경기 침체라는 말이 무색하다. 지난해 3/4분기 누적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이 각각 11조2천5백억원과 9천4백억원을 기록해 이미 2007년 한 해 실적을 넘어섰다. 또, LG화학은 2010년부터 2015년까지 2차전지만으로 주행하는 세계 최초 양산형 전기자동차인 제너럴모터스(GM)의 ‘시보레 볼트’에 2차전지를 단독 공급한다. 미래 성장 동력까지 확보한 것이다. 육부사장은 “우수 인력을 확보·육성해 조직 역량을 강화한 것이 경영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LG화학의 인간 존중 경영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에 기초한다. 구회장은 지난해 11월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을 모아놓고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변화와 혁신의 중추는 우리 직원들이고 이들이 회사의 미래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존 코터 하버드 대학 경영학 석좌교수는 ‘경영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인력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화합하는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인간 존중 경영은 기가 막힌 반전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한다. 대구지하철공사는 지난해 12월 노사문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한국생산성본부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지하철서비스 부문 2위에 올랐다. 지방 공기업 경영평가에서는 3위에 올랐다. 수익은 20% 성장했다. 얼핏 보면 실적이 나쁘지 않은 공기업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회사의 변신은 기적에 가깝다. 대구지하철공사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 연속 파업했다. 파업 일수만 93일이나 되었고, 노동쟁의 일수도 3백65일이나 되었다. 직원들은 열차 운행을 중단하고 선로를 점거하는가 하면 본사 건물 출입구도 컨테이너로 막았다. 공기업으로서는 가장 긴 88일 동안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공사가 입은 손실은 추산이 불가능했고 직원들은 임금 1백20억원을 받지 못했다. 2003년에는 중앙로역 화재 참사가 발발해 기업 이미지는 회복하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실추되었다.

대구지하철공사가 변화를 꾀한 계기는 위기의식이었다. 존 코터 하버드 대학 경영학 석좌교수는 “기업 변화는 위기를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갈파했다. 대구지하철공사 경영진은 전임 노조 임원 2명을 본사로 발령해 누적 적자를 비롯해 경영 정보를 공개했다. 그 다음 신뢰를 형성하기 위한 단계로 변화를 이끌 추진체를 구성했다. 노사가 함께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노무 진단도 시행했다. 고용안정위원회도 설치해 고용 불안도 없앴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가장 골치 아팠던 대구지하철공사가 지방 공기업 경영 혁신 모델이자 벤치마킹 대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기업 변화는 위기를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계약제 고용제 같은 원가 절감 방안을 도입했다. 핵심 역량이 아닌 사업부는 처분했고 유휴 인력은 해고했다.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계약제 고용을 늘렸다. 기업들은 사업부를 언제든지 팔 수 있는 자산 포트폴리오로 여겼다. 다운사이징과 아웃소싱은 기업이 이윤을 창출할 기회를 줄였다. 인건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자기 조직 문화를 황폐화시켰다.

현대자동차는 외환위기에 대처하고자 대량 해고를 감행했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현대차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대차는 한 해도 빠짐없이 노사 분규에 시달린다. 임금이나 복지 수준은 업계 최고이나 분규는 끊이지 않는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는 “회사는 언제든지 직원을 버릴 수 있다고 판단하면 애사심은 없어지고 재직 중에 건질 수 있는 대로 건지자는 심정으로 ‘한탕주의’에 빠진다”라고 말했다. 고용 보장이 자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계속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업이 평상시 총 고용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고용보장이다. 제프리 페퍼 스탠포드 대학 경영학 교수는 저서 <인간방정식>에서 ‘고용 안정은 인간 존중 경영의 기초이다. 신중한 선발 관리, 광범위한 교육 훈련, 정보 공유, 권한 위임 같은 인간 존중 경영 관리 방식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라고 밝혔다.

현대차, ‘혼류 생산’으로 대량 해고 위기 넘어

▲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 - “경차와 고급차가 고속에서 성능 차가 드러나듯, 불황이 깊어질수록 기업마다 인간 존중 경영의 성패가 드러날 것이다.” ⓒ시사저널 유장훈

현대차 경영진은 외환위기 당시의 학습 효과 덕인지 이제 다른 방법으로 위기에 대응한다. 경제 위기의 여파로 대형차 생산 라인이 멈추자 소형차 생산 라인으로 생산직 직원을 전환 배치했다. 대량 해고는 아직 고려하지 않는다. 인력 감축보다는 ‘혼류 생산’이라는 생산 방식을 도입해 위기에 대처하려 한다. 혼류 생산은 한 라인에서 여러 차종을 함께 생산하는 방식이라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혼류 생산 도입을 주도하는 이는 윤여철 현대·기아차 부회장이다. 윤부회장은 지난해 12월 생산·노무 총괄 부회장으로 승진한 현대차 내 노사 관계 전문가이다. 윤부회장은 노동조합 간부와 함께 수시로 해외 공장 견학을 다녀온다. 노조와의 소통이 없이는 아무리 효율적인 생산 방식이라도 채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6월 ‘노사 관계가 기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를 조사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사 관계가 좋은 기업은 혁신적 인사 관리 기법인 인적자원관리(HRM)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인적자원관리 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일수록 기업 실적은 향상되었다. HRM은 직원의 조직 몰입도와 숙련도를 높이고 업무 배정과 의사 결정에 직원을 참여시키는 인사 관리 기법이다. 노사 관계가 좋을수록 새 경영 기법을 쉽게 받아들인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으면, 직원들은 생소한 경영 기법을 도입하는 경영진의 의도를 의심하고 수용을 주저하게 된다. 신뢰와 의사 소통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경제 위기는 한국 경제의 인간 존중 경영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개별 기업이 도입하는 인간 존중 경영이 가진 진정성과 깊이는 경기 침체가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더 분명해질 수 있다. 불황은 기업들에게 손쉬운 방법을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형성된 신뢰와 비전 공유가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는 “시속 60㎞로 달릴 때는 경차와 고급차의 차이가 없으나 고속 주행시 엔진의 부하가 많이 걸리면 성능 차이를 실감할 수 있듯이 불황이 깊어질수록 개별 기업마다 도입한 인간 존중 경영의 성패가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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