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저주’에 떠는 기업들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9.02.0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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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합병이 오히려 화 부르는 경우 많아…유동성 악화로 자금난 등 후유증 심각

▲ 롯데칠성의 정황 대표이사(가운데)와 (주)두산 강태순 부회장(왼쪽 두 번째)이 1월6일 롯데주류 BG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 기업들 사이에서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떠돈다. 굵직한 인수·합병(M&A)을 성사시켰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을 빗댄 것이다. 경제 호황기 때만 해도 이들은 M&A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유동성이 악화되자 기업 전체가 흔들리는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부채비율을 어떻게든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 알토란 같은 자산까지 매물로 내놓고 현금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시중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진그룹이 대표적인 예이다. 유진그룹은 지난 몇 년간 유진투자증권(구 서울증권), 하이마트, 로젠택배 등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M&A의 강자로 인정받았다. 대우건설 인수전에서만 실패했을 뿐이다. 하지만 무리한 사세 확장으로 자금난에 봉착했다. 결국, 1천8백억원을 투자한 유진투자증권을 매물로 내놓고 르네상스사모투자펀드(PEF)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협상을 벌였으나 무위로 끝나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두산그룹, 인수한 ‘밥켓’이 알짜배기 계열사 매각하는 악재로

회사측은 자금 경색 타개를 위해 자사 보유분 부동산을 거의 매각했다. 직원들을 위한 사택용 빌라까지도 모두 팔았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유진인터빌은 지상 4층에 18채의 주거 공간이 있는 건물로 지방에서 올라온 유진그룹 사원을 위한 사택으로 사용되었다. 자산 가치가 얼마 되지 않는 이 건물마저도 처분했다는 것은 회사 사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설명해준다.

유진그룹의 관계자는 “유진인터빌은 엄밀히 말해 직원 사택용 아파트는 아니다.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방송국 드림시티에서 사택처럼 썼던 빌라이다. 드림시티를 CJ에 매각하면서 건물을 인수해 우리 직원들이 이용했고, 지난해 매각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하이마트를 인수하면서 채무가 3천5백억원 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단기 채무를 연장하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해 한숨을 돌렸다”라고 해명했다.

금호그룹 역시 지난 1월6일 그동안 그룹 사옥으로 사용해온 서울시 종로구의 금호생명 빌딩을 2천4백억원에 매각했다. 지난 2006년 12월 대우건설을 인수하며 걸었던 풋백옵션이 발목을 잡았다. 금호그룹은 미래에셋, 신한은행 등 재무적 투자자와 주가가 일정 수준(3만3천원) 이하로 떨어질 경우 주식을 되사주기로 하는 풋백옵션을 걸었다. 현재 1만원대인 대우건설 주가가 갑자기 폭등할 가능성도 작은 상황에서 4조원 상당의 현금을 준비해야 하는 풋백옵션 조건은 엄청난 부담이다. 회사측이 안고 있는 4조2천억원의 단기 차입금도 큰 고민거리이다. 지난 1월23일 발행한 7백억원 상당의 대한통운 회사채와 오는 2월6일 추가로 발행할 8백50억원 상당의 회사채가 어느 정도 숨통을 틔워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경우 알짜배기 계열사를 시장에 내놓은 경우이다. 두산은 최근 주류 부문과 테크팩 등 우량 계열사를 잇달아 매각해 현금을 확보했다. 5백억원 상당의 회사채를 발행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또다시 4천억원의 회사채도 발행했다. 두산그룹은 “충분한 현금을 확보해 시장에서 우려하는 유동성 위기는 더 이상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테크팩과 주류 부문의 매각으로 9천억원의 현금을 확보하는 등 선제적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지난해 말 현재 현금 보유액이 1조5천억원이다. 주류 매각대금 5천30억원을 여기에 추가하면 2조원 수준에 달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두산의 사업 구조는 발전·담수 등 수주 사업이 대부분이며, 이미 3년 이상의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인프라코어의 골삭기 사업도 각국이 최우선시하는 SOC 투자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꼽히는 만큼 일각에서 제기되는 유동성 악화설은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시장의 우려는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두산이 거액을 들여 인수한 미국 밥켓의 경영 전망이 예상외로 좋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다 그룹의 핵심 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의 지난해 4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에 비해 각각 20%와 90% 안팎으로 감소할 것으로 추정되면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양희준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두산이 의욕적으로 인수한 밥켓이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동안 순조롭게 파이를 키워나갔던 두산인프라코어마저 실적이 악화될 경우 기름에 불을 지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기평도 최근 두산엔진의 기업어음 신용등급을 A2로 평가하면서 두산그룹의 악재를 우려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정상훈 수석연구원은 “두산그룹과 관련해 최근 부각되는 악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중공업 부문 계열사들의 신규 수주 부진이고, 또 하나는 밥켓의 재무구조 개선 부담이 전반적으로 그룹 경영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M&A에 나섰던 기업들이 ‘승자의 저주’에 허덕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삼고 역공을 펼치고 있는 기업도 있다. 롯데그룹은 국내 소주시장 2위 업체인 두산 주류사업을 5천30억원에 인수했다. 소주시장에 이어 맥주시장에도 진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2조원 안팎으로 예상되는 OB맥주 인수전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이를 위해 다음달 2천억원가량의 회사채를 발행할 계획이다. 주류 사업 외에도 지난해 9월에는 네덜란드 초콜릿회사 길리안을 1천7백억원에, 10월에는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계 대형 마트 마크로 점포 19개를 3천9백억원에, 12월에는 코스모투자자문을 6백29억원에 각각 인수했다.

지난해 12월29일 서울시 중구 소재 사옥을 9백50억원에 매각한 대한전선은 M&A 후유증을 차단하기 위한 선제적 대응 차원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사옥을 매각하며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매각 덕분에 현금 사정이 나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금 많은 재벌 그룹은 M&A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 얻을 수도

한화그룹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에서 사실상 발을 뺌에 따라 6조원이 넘는 인수가액의 조달 부담에서 벗어났다. 강호균 홍보팀 부장은 “산업은행이 결국 실사를 못하게 했고, 우리 쪽에서도 뜻하지 않은 경제 위기로 자산 유동화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 대우조선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인수작업이 여의치가 않았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오히려 한화그룹의 불확실성이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매각 협상 결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류승화 동양종합금융증권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경제 상황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기업 인수 시장이 완전히 죽었다고는 볼 수 없다. 롯데나 삼성, 현대차그룹 등 현금이 많은 재벌 그룹에는 이런 경제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롯데의 경우 연간 2조원 규모의 영업 현금이 매년 발생한다. 최근 몇 해 동안 2조1천억~2조2천억원을 영업 설비에 투자하는 바람에 부채가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2년 전 롯데쇼핑 상장으로 4조원의 현금을 확보하면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앞으로 큰 자금이 필요한 프로젝트에도 롯데건설을 비롯한 비상장사를 상장시켜 자본을 모을 여력이 충분한 만큼 M&A 시장의 새로운 강자가 될 것 같다”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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