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일상화하라”
  • 교토·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2.0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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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식 기업> 저자 스에마쓰 지히로 교수 인터뷰

스에마쓰 지히로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는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학자가 아니다. 그는 일본 교토에 산재한 교토식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세계 최고 제조업체들의 경쟁력과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그 연구의 성과물을 저서 <교토식 기업>에 담았다. 그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교토식 경영’과 ‘일본 교토와 실리콘밸리’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지난 1월28일 방학이라 다소 한적한 교토 대학 경제학부 건물을 찾았을 때 스에마쓰 교수는 교토 기업들과 함께 ‘기업 경쟁력 강화 방안’에 관한 비밀 프로젝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이라 일컬어지는 장기 불황에 빠져 있을 때도 교토식 기업은 성장을 거듭했다. 현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교토식 기업의 경영 전략이 여전히 유효한가?

교토식 기업은 체질적으로 위기에 강하다. 교토식 기업은 탁월한 위기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1990년대 일본이 장기 불황을 겪을 때 위기를 대처하는 능력을 키웠다고 보아야 한다. 교토식 기업은 늘 위기를 상정해놓고 경영 전략을 짠다. 도쿄에 본사를 둔 일본 업체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사업부를 정리하거나 인원을 줄이는 극단적인 방법을 채택한다. 이와 달리 교토식 기업은 오히려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거나 차세대 제품 개발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 위기가 지나고 경제가 다시 성장할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교토식 기업은 위기를 경영 혁신의 호기로 삼는다. 평상시라면 사원 반발로 실행할 수 없는 혁신 과제라도 위기 상황이라면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다. 세계 1위 모터 제조업체이자 대표적 교토식 기업인 니혼덴산의 예를 들어보자. 니혼덴산은 청결과 정리 정돈을 강조한다. 시게노부 나가모리 니혼덴산 창업주는 위기에 처한 기업을 인수한 뒤 해당 기업의 종업원들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 행동 양식이나 습관을 바꿔 정신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이다. 교토식 기업은 이번 경제 기회를 활용해 호황기에 미루었던 개혁과 개선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혁신 활동이 축적되어 그 성과가 임계점에 이르면 새 기회와 성장동력을 찾을 것이다.

교토식 기업은 전세계 시장을 공략한다. 특정 시장이나 기업에 의존하지 않아 한 지역 경제가 침체하더라도 그로부터 받는 악영향은 제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세계가 동반 침체되어 있다. 교토식 기업에게도 위기 상황이 아닌가?

교토식 기업도 실적 악화를 피할 수 없다. 일본이 장기 불황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교토식 기업은 미국·유럽·아시아 시장을 공략했다. 지금처럼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하는 상황에서는 유효할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교토식 기업은 경제 위기나 불황이 닥쳤을 때 핵심 역량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교토식 기업은 ‘선택과 집중’에 탁월하다. 자기가 선택한 시장에서는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과 기술력에서 경쟁 업체를 압도한다. 경영 효율도 세계 최고이다. 기업 규모를 키우거나 매출을 늘리기보다 경상이익률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그러다 보니 내부 유보금이 많고 빚은 거의 쓰지 않는다. 무라타는 2~3년 동안 영업을 중단하더라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내부 유보금이 많다. 기술은 모듈화한다. 최종 소비재를 생산하지 않고 그 소비재 제작에 필요한 부문 기술이나 제품을 모듈화해 다른 제품 개발에 원용할 수 있게 한다. 갖가지 제품 개발에 확장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제품 단위를 갖고 있으면 수요 변화나 기술 혁신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사업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절대 우위라는 시장 지위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다음 기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차세대 제품을 개발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교세라는 2010년 매출 2조 엔 달성이라는 비전을 발표하는가 하면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인 산요를 인수했다. 무라타는 2015년 매출 1조 엔 달성이라는 경영 목표를 발표했다. 니혼덴산은 인수·합병(M&A)을 성장 전략으로 삼고 있다. 매출보다는 수익, 덩치 키우기보다는 내실을 중시하던 교토식 기업의 경영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주가 상승을 바라는 주주들의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한다. 교토식 기업은 세계 최고의 모듈 기술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최종 소비재 제조업체로 변신하면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제품 구성 전략이나 기술을 수직 통합하면 부가가치를 기업 내부에 쌓을 수 있다. 그런 탓에 경영자는 수직 통합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수직 통합 전략은 최종 소비재를 만드는 업체로 가는 수익을 기업 내부로 끌어들 일 수 있어 얼핏 좋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안정 성장과 위기 관리 같은 장기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경영 효율이 떨어져 교토식 기업이 지금까지 누렸던 이점이 사라진다. 지금 사상 초유의 경기 침체라는 위기가 닥쳤다. 그동안 덩치 키우기에 매진하던 기업들은 후회하고 있다고 본다.

교토식 기업의 주력 제품군은 축전지, 세라믹, 모터, 반도체 부품이나 소재이다. 전자제품 부품 시장에 가격 경쟁이 치열해져 교토식 기업의 수익성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심해지면 교토식 기업도 본질적인 위기에 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교토식 기업은 경쟁 업체가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자랑한다. 따라서 산업 판도를 바꿀 만한 신소재나 신기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기술 흐름과 산업 정보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이에 대한 전략도 세우고 있다고 본다. 자사가 보유한 기술이나 제품 경쟁력에 기초해 수익성 높은 시장이나 기회를 끊임없이 엿본다. 그렇다고 생소한 영역으로 진입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자사가 보유한 기술을 확장·변형하거나 보유 기술을 모듈 단위로 구성해 새 제품 개발에 투입한다. 최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교토식 기업이 전세계 대기업이나 연구 기관과 경쟁할 수 없다. 기업 규모나 연구·개발비 금액에서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대신 교토식 기업은 앞선 기술을 응용해 제품으로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 앞으로 시장 판도를 뒤엎을 기술이나 소재가 나오면 이를 활용해 가장 경쟁력 있는 제품을 출시하는 곳은 교토식 기업이 될 것이다. 교토식 기업이 지닌 모듈 기술은 전자 산업이나 반도체 산업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응용할 수 있다. 신제품 개발이나 신규 사업 기회에 대응하는 데 전세계 어느 나라 기업보다 한 발짝 앞서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중소기업들이 위기에 강한 회사로 거듭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 가지 처방으로 병을 낫게 하는 특효약은 없다. 기업 스스로 경영 전략과 문화를 끊임없이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연구·개발 비용을 투입해도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지 못할까 걱정한다든지, 고객군을 다변화하다가 기존 고객까지 놓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서는 안 된다. 과감하게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적극적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내수 시장 공략에 치중하고 특정 고객에 의존하다 보면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회사 구성원 전체가 위기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평상시 위기에 대비하고 있어야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조처를 마련하려 하려면 늦다. 교토식 기업은 항상 위기에 대비했다. 차입금은 줄이고 현금은 충분히 보유한다. 신기술이나 신제품 개발 투자도 내부 유보금을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실패를 감수할 수 있다. 잦은 시행착오 끝에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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