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문 나서자마자 ‘막장’ 인생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9.02.10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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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세대가 말하는 지난 10년 / “이 직장 저 직장 전전하다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 외환위기 이후 취업난에 시달려야 했던 IMF 세대들이 당시 구인 광고를 실은 신문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년은 내 살길을 찾아 헤매던 시간이었다.” 91~92학번(남), 94~95학번(여)들은 98~99년쯤 졸업을 했다. 이때는 사상초유의 국가 부도 사태를 겪은 IMF 관리 체제였다. 그래서 이들을 IMF 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직장을 골라잡을 수 있었던 선배들과는 달리 첫출발부터 줄어든 일자리 때문에 살벌한 경쟁에 내몰렸고 이후 떠돌이 인생처럼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하며 살아남은 첫 세대이다.

김택호씨(가명·92학번)는 3수를 하는 바람에 인생이 꼬였다. 김씨는 “1997년에 대학을 졸업한 고등학교 동기들은 버젓한 직장에 쉽게 들어갔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정부가 지원하는 인턴 제도의 도움을 받아 한 지역 케이블방송 인턴기자로 겨우 채용되었다. 처음에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회사에 이용당했을 뿐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가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받은 돈은 월 50만원. 그래도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1년4개월을 일했다. 하지만 건질 것이 없었다. 김씨는 “회사 선배들 학벌이 나보다 훨씬 낮았다. 물론 학벌로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체계도 잡혀 있지 않은 조그마한 방송국에서 배울 것은 전혀 없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2000년 회사를 나온 김씨는 치과대학을 목표로 편입 공부를 시작했다. 학구열 때문이라기보다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2년을 공부와 씨름했지만 결과는 낙방. 결국, 집에 손을 벌려 조그마한 컴퓨터 가게를 하나 차렸다. 그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창업 당시에는 월드컵 특수를 맞아 1~2년간은 장사가 잘되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매출이 1억원도 되지 않는다. 김씨는 “2명 있던 직원들도 다 잘랐지만 여전히 적자이다. 사업을 접고 싶어도 권리금과 투자금을 생각하면 접을 수도 없다”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김씨는 2007년부터 투잡에 나서고 있다. 과외 선생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아내를 도와 함께 과외 선생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다 2007년 8월에는 여동생이 운영하던 학원을 넘겨받아 운영 중이다. 물론 사업 자금은 은행 대출과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충당했다. 김씨는 “원래 목표는 마흔 살이 되던 해부터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시스템이 돈을 벌어주도록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결국, 목표를 10년 뒤로 늦췄다. 이렇게 따지면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임지용씨(가명·92학번)도 지난 10년간 여섯 번을 이직했다. 1999년 7월에 졸업한 임씨는 처음부터 중소기업으로 눈을 낮췄다. 덕분에 졸업과 동시에 영어 교재를 판매하던 벤처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2년 뒤 회사는 부도 처리되었고, 곧바로 의료기기 해외영업직으로 이직했다. 또다시 2년 뒤 자판기 내 지폐 식별기를 생산하는 제조업체로 옮겼다. 그리고 2년 뒤 의료기기 회사로 옮겼고, 지난해 7월부터는 아예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차렸다.

우여곡절 겪으며 “강해졌다”

임씨는 “이직을 반복했던 이유는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처음 들어갈 때는 월 1백20만원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월 3백80만원까지 받았다. 대신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해야 하는 탓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라며 힘들었던 지난 10년을 술회했다.

당시 졸업생 가운데 전공을 살려 취업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체육교육학을 전공한 송창민씨(가명·91학번) 역시 지금은 에어컨 판매를 하고 있다. 송씨는 “4학년 때 IMF 사태가 터지고 나니 교사 채용 인원이 5분의 1로 줄었다. 과거 10 대 1이던 경쟁률이 70 대 1까지 치솟았다. 선후배 할 것 없이 교원 임용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라고 전했다. 송씨 역시 임용시험을 포기하고 스포츠센터 수영 강사로 2년 정도 일하다 영업사원으로 전향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경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아 고통의 10년을 보낸 이들이지만 이구동성으로 ‘후회는 없다’라고 말한다. 김씨는 “우여곡절을 겪은 만큼 강해졌다. 지금은 어떤 일이 닥쳐와도 이겨낼 자신감이 생겼다. 내 사업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도 인생 경험으로 채득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후배들도 열심히 살면 희망이 보인다는 점을 명심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기 바란다”라고 조언했다. 


외환 위기 때보다는 나은 편이라는데…

그때는 채용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규모가 작으나 공채는 살아 있다.

정부가 1997년 12월,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난 이후 기업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있던 사람들도 정리하던 판에 신규 직원을 뽑을 리 만무했다. 1998년 상반기 신입사원을 뽑은 대기업은 LG그룹 3백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그해 20대 실업자가 57만명으로 1997년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1999년 2월에 졸업한 김택호씨(가명·92학번)는 “1998년 하반기에 취업 원서를 내려고 해도 뽑는 곳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졸업 동기 40명 가운데 3명만이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그것도 정부가 지원하는 인턴 제도를 통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정식 채용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반기로 넘어가니까 경기가 조금씩 풀리면서 공채가 나왔다”라고 설명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채용 상황이 다소 나은 편이다. 채용 인원이 대폭 줄기는 했지만 채용 공고가 꾸준히 나오고는 있다. 예비 졸업생들은 이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이 더 심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올해 졸업하는 이영화씨(가명·04학번)는 “‘옆집 아이는 취업했다더라’는 말을 들으면 나뿐만이 아니라 부모님까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그래서 더욱 죄송한 마음이 든다”라고 털어놓았다.

취업난, 그때는 졸지에 당했으나 지금은 알면서 당하고 있다.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91~92학번(남), 94~95학번(여)들은 원서만 넣으면 취업하는 선배들을 보며 대학 생활을 했다. 선배들 역시 ‘3학년 때까지 놀다가 4학년 때 잠깐 준비해도 취업할 수 있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조민형씨(가명·92학번)는 “졸업할 무렵 기업에서 토익 점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졸업 동기 가운데 토익 공부를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학연수도 잘사는 집 친구들만 가는 호사였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토익 9백점 이상, 어학연수 경험은 필수이다. 입학과 동시에 학점 관리, 경력 관리에 여념이 없다. 그러고도 취업난에 시달리다 보니 자신감은커녕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이다. 토익 9백20점, 학점 3.9점, 각종 봉사 활동과 인턴기자 경험을 가진 황지영씨(가명·04학번)는 “될 만한 친구들도 취업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기가 죽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공무원·교사 인기는 여전하네

IMF 세대와 금융 위기 세대는 경제 불황으로 취업난에 내몰린 세대이다. 시대적 상황이 비슷해 공유하는 것도 있지만 10년이라는 시간 차로 인해 다른 인생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생활상을 몇 가지 사례로 비교해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무용지물 ‘인턴’ 

지금은 흔하디 흔한 인턴 제도가 최초로 도입된 시기는 1998년 IMF 구제금융 이후부터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인턴 제도는 1999년부터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해 환경운동연합에서 인턴직원으로 일했던 이미선씨(가명·95학번)는 “정부 지원금인 월 50만원을 받고 6개월 동안 일했다. 더 일하고 싶어도 지원금이 끊기자 시민단체가 나를 채용하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예산으로 재교육을 시켜 실질적인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줬더라면 지금쯤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며 씁쓸해했다. 이씨는 현재 가정주부로 두 아이의 엄마이다.

정부는 올해도 어김없이 행정인턴 제도를 청년 실업 대책으로 내놓았다. 곧 2만5천명에 달하는 인턴들이 양상된다. 현재 지역 경찰서 지구대에서 행정인턴으로 활동하는 박대진씨(가명·03학번)는 “업무 특성상 비밀 서류가 많은 데다가 정부가 잡무는 시키지 말라고 지시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경찰 직원들도 지구대에서 취업 공부나 열심히 해서 빨리 나가라고 말할 정도이다. 100만원에 달하는 월급이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경력을 쌓거나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월 30만원을 받더라도 비전을 제시해주는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인턴 제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똑같았다.

철밥통을 향해 가고, 또 가고

최고의 직장이나 최고의 신붓감·신랑감 설문조사를 하면 늘 상위를 기록하는 공무원과 교사. 이 직업의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한 때도 1998년부터이다. 행정학을 전공한 안나영씨(가명·95학번)는 “입학하던 해인 1995년만 하더라도 선배들 대부분이 쉽게 공무원이 되었다. 인맥을 통하거나 공공 기관에서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험도 보지 않고 공무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98년 IMF로 기업 공채가 확 줄어들자 경쟁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응시생이 너무 많은 탓에 합격 점수가 만점 수준까지 올라갔다. 아직도 대학 강의실 복도에서 친구들과 ‘무슨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3백 대 1이 넘느냐’며 혀를 찼던 기억이 생생하다”라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안씨는 3학년 때 7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시대 분위기를 감지하고 4학년 때 9급으로 시험 난이도를 낮췄다. 그리고 졸업 이후 1년 동안 서울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고도 안씨는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

공무원과 교사의 인기는 10년이 지나도 식을 줄 모른다. 오히려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대한 반감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구직자들은 점점 늘어나는 실정이다. 지난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국회사무처 9급 공무원 경쟁률은 6백 대 1을 넘어섰다. 공무원 시험일이 되면 지방에서 시험을 치러 오는 수험생들로 인해 버스나 열차가 추가로 배치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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