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픔’ 아시는 당신에게…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02.17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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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인문학 소통, 세상의 ‘고통’에 대해 입을 열다

▲ 중환자실에는 고통 속에서 연명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많다.
암환자를 옆에 두고, 환자의 고통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무덤덤한 얼굴로 간호사에게 체크 사항을 지시하고 환자 가족에게도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서는 의사를 본 일이 있는가.

최근 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한 판결을 내려 논란이 뜨겁다. 논란과 함께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는 병원이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 진정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도 꼬리를 문다. 사람의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으로 알려진 의학. 역설적이게도 현대 의학에서 ‘고통’을 주제로 제대로 논의를 벌인 적이 있느냐고 의사들조차 반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소장 강신익)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의학·한의학·간호학·철학·문화인류학·사회학·문학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과 고통과 싸우고 있는 환자를 필자 또는 대담자로 참여시켜 통합적인 논의를 펼쳤다. 그 결과물로 나온 <인문의학> ‘고통’ 편은 의학과 인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의료 현장에서 소외된 고통이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실천 가능한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강신익 소장은 이 책의 서문에서 “최근 의학에서도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와 교육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증의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개척되기도 했고, 과학적 의학에 인문학의 정신과 방법론을 도입하려는 의료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의학자와 인문학자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과학적이지만 차가운 의학에 실망한 대중의, 따뜻한 인간관계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물론 100년 이상 떨어져 나름대로의 길을 걷던 두 학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 고통도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면 성취감도 없을 것이며,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라며 질병 치료나 예방이 중요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고통을 살피고 대처하는 의료에 대한 고민도 시급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의학이 인문학의 눈을 빌려 통합적으로 ‘고통’을 이해하려고 나선 것은 20세기 의학이 지나치게 과학 위주로 흘러 윤리 문제에 대한 현실적 담론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데서 출발했다. 성과나 업적만 중시되는 의료 현장에서 환자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 의사는 환자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다. 다만, 의뢰해온 치료 한 건을 과학적으로 해결해주는 데 그칠 뿐인 것이다.

이 책은 ‘고통’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의학과 인문학, 동서의 철학과 고전학, 문학 등 각 전공 학문들 사이의 장벽을 넘어서는 사유의 시작이다. 세상에서는 의학이 차가운 이성에 취해 따뜻한 인간미를 잃어버렸다고 하고, 인문학이 인간의 삶을 해명하지 못한 채 위기에 처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두 학문의 위기를 둘 사이의 소통으로 넘어서려는 몸짓이다. 의학은 인문학에서 삶의 의미를 읽고 인문학은 의학에서 새로운 사유의 소재를 얻는다면 그 둘의 상승 작용을 통해 인간과 건강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은 의학과 더 건강한 삶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남의 고통을 함께 이해할 수 있어

오죽하면 ‘인술’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의학이 돈만 벌겠다는 의사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술을 베푸는 의사도 세상 곳곳에서 땀 흘리고 있으므로, 환자를 위해 고통을 돌아보는 인문의학이 병원 곳곳에 퍼져나가는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간단히 진통제를 처방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메스를 들이댄다.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을 이겨나갈 방법을 함께 찾는 의사, 그런 의사에게 가고 싶어하는 것은 환자들의 권리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또, 동서고금의 의학과 인문학이 서로 만나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열고 질병 치유의 새로운 지평을 찾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고통을 버리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의 본질을 보는 것이 그대로 즐거움’이라는 불교의 입장처럼, 고통을 무조건 멀리하려는 것보다 삶의 의미를 묻게 만드는 기제로서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넉넉함도 배울 수 있다.

의료 현장이든 강단이든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행복에 관한 고민을 풀어보려는 것이다. 아픈 아이를 꼭 껴안듯 주위의 고통에 손 잡아주는 것, 그리 멀고 험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안락사·존엄사 문제도 술술 풀릴 것 같다. 그런데 왜 세상은 각박해지는 것일까. 먹고사는 일이 급해서라고? 살아가는 일 또한 고통임을 헤아린 이 책은 또 말하고 있다. 고통은 말이 없으니, 말보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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