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없으니 권력에 ‘무한도전’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2.24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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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종신 집권’ 길 터

▲ 차베스 대통령이 투표소를 떠나면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AP연합
베네수엘라를 10년 동안 통치한 위고 차베스 대통령이 2월15일 국민투표에서 자신의 재출마를 영구히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지하는 국민투표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그는 종신 집권의 길에 들어서 그의 사회주의 혁명이 한층 동력을 얻었고, 남미에서 그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미국의 고민은 깊어졌다. 투표에 참가한 유권자의 54.5%는 찬성표를 던졌고, 45.6%는 반대했다.

이번 승리로 차베스는 2013년에 현재의 6년 임기가 끝난 뒤에도 재출마해 다시 6년을 집권할 수 있고, 그 후에도 자신을 누를 경쟁자가 없는 한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사실상 베네수엘라에서 견제 세력이 사라져 그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정책에 반대하는 독불장군의 좌파 노선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해 있을 여유가 많지는 않다. 사회는 양극화되었고 유가 하락으로 그가 그토록 호언한 빈곤 퇴치 프로젝트는 좌초했다.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의 양극화는 범죄 증가로 나타났다. 차베스의 인기를 유지해준 일등공신은 빈곤 퇴치였다. 2003년 54%였던 절대 빈곤층이 지난해 말 26%로 줄었다. 경제도 지난 10년간 연평균 13.5%씩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이 유가 상승과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통한 수출 촉진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유가 하락에 따른 재원 고갈로 빈곤 퇴치도, 개혁 드라이브도 제동이 걸렸다.

차베스는 개표가 거의 완료된 직후 승리 연설을 통해 ‘반동의 2월’이었다고 외쳤다.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을 침묵시킨 유권자들의 선택을 스스로 반동이라고 표현할 만큼 자신이 추진하는 좌파 혁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역설적으로 시인했다. 국민투표는 두 달 동안 서둘러 준비되었다. 상당한 반대와 항의 시위가 있었지만 노골적인 투·개표 조작이나 부정은 없었다. 차베스 덕분에 빈곤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지지 운동에 참가했다.

대중적 인기를 업은 차베스는 나름으로 승리를 예감한 것 같았다. 그는 2007년 재출마를 허용하는 포괄적 헌법 개정안을 밀어붙였다가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감지하고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앞선 국민투표에서 차베스의 패배를 보고 방심한 반대 세력이 허를 찔린 셈이다. 

1998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당년 54세의 차베스는 기막힌 탈출구를 고안했다. 선출직의 재출마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에 다른 공직자를 포함시킴으로써 자신의 재집권만을 위한 헌법개정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켜 유권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야당들도 그의 술수에 혀를 찼다. 그는 동시에 의회, 주요 정부 기구, 언론을 지지자들로 충원하고 대대적인 지지 운동을 벌였다.

유가 하락으로 ‘빈곤 퇴치’ 좌초

▲ 차베스 대통령 반대자들의 국민투표 반대 궐기대회. ⓒ로이터
그러나 차베스의 전도는 험난하다. “늘 같은 사람, 같은 정부, 같은 구호에 신물이 난다.” 반대표를 던진 한 유권자의 독백이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또 다른 유권자는 이번 투표로 미국과의 연결 고리는 잘렸다고 말했다. 대미 화해를 통한 경제 발전과 고립 탈피의 기회가 영영 사라졌다는 말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차베스에게 승리만 안겨주지 않았다. 글로벌 경제 위기와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라는 무거운 짐도 지웠다. 

혁명의 최대 장애물은 유가 하락에 따른 세수 손실과 수그러들지 않는 반(反) 차베스 여론이다. 그는 이를 의식한 듯 승리 연설에서 혁명의 냄새가 없는 일상적 국정 과제를 더 많이 제시했다.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고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다짐했다. 10년 전 취임 연설 때처럼 혁명을 들먹이지 않았다. 그는 또 “이번 투표가 반대자들의 승리이기도 하다”라는 반어법을 썼다. 베네수엘라 대학의 정치학과 엘리너 교수는 과거처럼 극단적 개혁 조치는 피하면서 여론을 살피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가 야망을 억제하고 반대자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지는 미지수이다. 그가 권력의 마술사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장기 집권의 욕망은 국민에게 때로는 경이로, 더러는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향후 행보를 확언하기는 어렵다.

구두가게를 운영하는 한 시민의 말이 함축적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차베스 같은 정치인에게 익숙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야망이 강한 차베스의 인기는 유가 상승 붐을 타고 덩달아 상승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대담해졌다. 그 결과 상당한 성과를 냈다. 그의 혁명적 과단성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석유회사들을 국유화할 때 확연히 드러났다. 석유 수출로 얻은 재원을 빈곤 퇴치에 투입했다. 빈민층에서 그를 환호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권한 집중이 지나쳤다. 정부·의회·사법 3권을 장악하고 주요 언론까지 수중에 넣었다. 비판의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한 야당지는 베네수엘라 건국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의 경고를 상기시키기까지 했다. “세상에 한 사람이 권력을 장기간 장악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라는 것이다. 차베스는 주요 회의석상에 볼리바르의 의자를 만들어놓고 자신은 국부의 뜻을 따라 혁명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의 반응은 싸늘하다. 속 보이는 쇼임을 알고 있다.  

차베스의 전기를 쓴 작가는 “그가 감성적 민주주의 속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국민의 정서를 포착하는 초인적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그런 제스처는 반발을 불러온다. 베네수엘라 정치에서 차베스에게 필적할 인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현실 정치를 속어로 포장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는 투표일에 앞서 스페인 철학자 유나무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늘 사랑의 한 주가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투표일이 밸런타인데이와 겹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순진한 청중들은 열광했다.

베네수엘라는 국가가 산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국가를 지배한다. 차베스는 석유를 혁명의 핵심 수단으로 삼은 후 국가 개조에 착수했다. 외국에는 비싼 값으로 석유를 수출하면서 국민에게는 배럴당 10센트의 싼 가격에 공급했다. 이 덕분에 수도 카라카스 거리에는 기름 먹는 수입 차량들이 질주하고 쇼핑센터는 신생 부유층으로 붐빈다.

차베스의 혁명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문제는 그의 과속이 나라를 통째로 망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깊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통치가 가져올 후유증은 무섭다. 언젠가 차베스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 후임자가 제대로 감당할지도 의문이다. 반대표를 던진 45%의 국민을 다루는 문제도 만만찮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차베스의 권력은 최소한 10년은 더 보장되어 있다. 아이 다섯을 데리고  35년간 셋집에서 살아온 한 가장은 차베스가 집이나 마련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왕에 장기 집권 길에 들어선 이상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국민의 바람이다. 그러나 그 열쇠는 유가가 쥐고 있고, 유가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차베스의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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