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후임’버리스의 전쟁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2.24 01:5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명 대가로 주지사에게 금전 제공 의혹 공화당 주의원들, 탄핵 절차 밟겠다고 나서

▲ 버리스(왼쪽)를 상원의원으로 지명한 뒤 매관매직 혐의로 탄핵당한 블라고예비치 전 일리노이 주지사의 연설 장면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아래). ⓒAP연합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넘겨받은 롤런드 버리스 의원(71·민주당)의 운명이 흥미진진하다. 버리스를 둘러싼 논란에는 매관매직과 야심, 거짓말 그리고 거대 정당의 복잡한 내부 관계 및 여야의 이해 충돌 등 정치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두운 면이 모두 뒤섞여 있다. 유력 잡지 <아메리칸 스펙테이터>는 이번 소동을 ‘버리스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버리스 의원은 지난 1월15일 퇴임을 1주일 남긴 딕 체니 부통령(당연직 상원의장)에게 의원 취임 선서를 함으로써 적법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미국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하는 7백9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법안 표결에도 참가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갖고 있던 연방 상원 내 유일한 흑인 의원이라는 희귀성도 함께 물려받았다.

 버리스의 상원 진출이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경력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지, 아니면 무덤이 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의 상원의원 취임은 법적 타당성보다 정치적 타당성이 문제가 되었다. 버리스는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임 요구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에 대한 탄핵 절차가 추진되고 있다.

 버리스는 일리노이 주 재무장관과 법무장관을 거쳐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정치인이지만 주 상원의원과 시카고 시장 선거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주지사 선거에만 3차례 출마해 모두 고배를 마신 불우한 정치인이다. 그는 항상 겸손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항상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은 야심찬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야심과 집념이 다시 발동한 것은 지난해 10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해져, 그가 갖고 있던 연방 상원의원직이 공석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지면서부터였다. 버리스는 그때부터 로드 블라고예비치 일리노이 주지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주지사 측근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오바마가 남긴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자기에게 줄 수 없느냐고 타진했다. 지난해 12월30일 블라고예비치는 버리스를 오바마 후임 상원의원으로 공식 임명했다. 그리고 2주 후 버리스는 의원 취임 선서를 하고 상원에 입성했다.

 일리노이 주를 비롯해 미국 대다수의 주법은 현직 연방 상원의원이 임기 중 대통령이나 부통령 또는 장관 등 행정부 고위직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다른 이유로 공석이 될 경우 해당 주의 지사가 후임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 추가 진술서에서 주지사 측근과 접촉 사실 밝혀 논란

 버리스가 직면한 정치적 가시밭길은 자신을 임명한 블라고예비치에서 비롯한다. 지난해 11월4일 대통령 선거 후 블라고예비치는 오바마의 상원의원 자리를 자신에게 최고의 돈을 낸 사람에게 경매 방식으로 팔겠다고 나섰다가 매관매직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블라고예비치는 지난해 12월9일 가택연금된 데 이어 올해 1월29일 주의회로부터 탄핵을 받아 주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구속된 상태였지만 법적으로 주지사 직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던 지난해 12월 말 전격적으로 버리스를 임명했다. 상원의원 버리스의 탄생은 시작부터 아이러니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가 얼마만큼의 거액을 제시하고 블라고예비치와 거래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일리노이 정계나 심지어 워싱턴 정계는 블라고예비치의 행실과 임명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불순한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리노이 주 하원은 공화당 의원의 주관 하에 버리스를 조사하기도 했다. 블라고예비치의 탄핵을 논의하는 청문회 자리에서였지만 두 사람의 금전 거래 여부를 함께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리스는 지난 1월5일 제출한 진술서를 통해 “지난해 12월26일 블라고예비치 고문 변호사를 만나 상원의원직 승계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을 뿐 블라고예비치 당사자나 그의 측근 누구와도 만나거나 접촉한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청문회 이후 해리 리드 연방상원 민주당 원내 총무 등 당 지도부는 모든 의혹을 접고 버리스가 제출한 관련 서류에 법률적 하자가 없다고 판정하며 그의 취임에 동의했다. 미국 헌법이 의회에 동료 의원에 대한 심판권을 부여하고 있는 절차를 따른 것이었다.

 버리스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지난 2월4일 그가 일리노이 주의회에 다시 제출한 추가 진술서 때문이다. 이 진술서에서 버리스는 블라고예비치 측근 6명과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나아가 블라고예비치의 동생이자 정치자금 모금 책임자인 로버트 블라고예비치와 3차례 접촉한 사실도 밝혔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인 지난해 11월4일 전에 한 차례 그리고 후에 두 차례 접촉했으며 당시 로버트 블라고예비치는 자신에게 1만 달러의 정치자금 기부를 요구했다고 시인했다. 추가 진술서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버리스와 로버트 블라고예비치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녹음했다는 사실을 시카고 지방신문이 보도한 지 1주일 뒤에 나왔다.

연방상원과 일리노이 주의회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꺼림칙했지만 법률적 하자가 없는 소속 의원을 믿고 넘어가기로 했던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대다수가 관망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직설적으로 버리스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버리스의 말 바꾸기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노이 주의회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아예 버리스를 위증죄로 고발하고 탄핵 절차를 밟겠다고 나섰다. 1차 진술에서 위증을 하고 상원의원에 취임한 다음 진실을 밝히는 행위 자체를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연방상원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아예 버리스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그리고 부패한 주지사가 임명한 위증 상원의원의 자리는 보궐선거로 다시 채워야한다고 주장한다. 현재로서 버리스가 사임하거나 탄핵될 경우 보궐선거는 불가피하다.

인종 차별·연좌제 등 민감한 문제도 있어 언론은 ‘신중’

 그러나 버리스는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다. 그는 우선, 추가 진술서는 1차 진술을 수정하거나 말 바꾸기를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진술하지 못했던 사실을 추가로 확인한 것일 뿐 위증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버트 블라고예비치의 정치기부금 요구를 ‘오히려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지난해 6월 말 블라고예비치측에 정치기부금을 낸 이후 현재까지 블라고예비치와는 현금 거래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흑인 사회는 의회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유일한 흑인인 버리스를 퇴출시킨다면 인종 차별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카고데일리 옵저버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로우저는 “버리스가 백인이었으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버리스를 탄핵할 경우 인종 대결이 발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시카고의 민주당 정치 컨설턴트 돈 로우즈도 부패한 임명권자 때문에 잘못이 없는 피임명권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일종의 연좌제라고 비판했다.

 언론은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시카고트리뷴은 사설을 통해 버리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심증은 가지만 아직 그의 잘못을 예단할 때는 아니라고 말했다. 두고 보자는 입장이다.

 CNN의 법률분석가 제프리 투빈 역시 버리스가 추가 진술서로 위증 혐의 기소를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증죄는 잘못된 증언에 대해 적용되는 것이지 버리스의 경우처럼 애매모호한 진술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투빈의 설명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